||||||||||||| 2018. 5. 14. 20:45










"카르나."




카르나는 물뿌리개를 한손에 든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눈앞에 한 아름의 꽃이 내밀어졌다. 턱 밑으로 안겨진 꽃다발을 얼떨결에 받아들며 카르나는 그 너머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길가메쉬? 이게 웬."


"듣자하니 오늘은 연인들끼리 장미를 주고받는 날이라더구나."


"장미……."




카르나는 받아든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길가메쉬가 내민 것답게도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생김새의 장미가 가득하다. 코끝으로 특유의 향이 훅 끼쳐와 카르나는 숨을 들이켰다. 가운데 부분이 오렌지빛에 가까운 황금색의 장미는 햇볕에 잘 달구어진 모래와 바람의 향기도 함께 품고 있었다. 길가메쉬를 닮은 장미다. 




"……고맙다.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이군."


"말로만 할 생각은 아니겠지?"




몸을 굽혀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뒤, 카르나는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자연스레 얼굴을 가까이 하자 길가메쉬가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비어 있는 손을 길가메쉬의 뺨에 얹고 카르나는 웃음기 띤 입술에 가볍게 입맞췄다. 








"……그 영웅왕의 장미라고요?"


"아침에 받았다."




식후의 차이 티를 즐기고 있던 아서 팬드래건은 으음, 하고 목을 울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카르나는 자신 몫의 찻잔을 들고 와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의 가운데에는 아침에 길가메쉬가 주고 갔던 장미를 다듬어 꽂은 꽃병이 놓여 있었다. 


아서는 그 꽃을 열렬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길가메쉬가 준 것이니 보통의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런가?"


"보통의 것이 아닌 정도, 가 아니라."




두 사람은 식물이라는 공통적인 관심사를 지니고 있어 자주 만나고는 했다. 그 관심의 대상이 카르나는 관상용, 아서는 식용이라는 데에서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지식의 조예는 아서 쪽이 더 깊다. 




"아마 이것은 최초의 재배 장미일 겁니다. 저도 그 생김새는 이야기로 들었을 뿐입니다만, 길가메쉬 왕의 재보에서 나온 것이라면 틀림없겠지요."


"……최초의."


"그의 재보에는 모든 보물의 원형이 들어 있다고 하니까요. ……장미 역시 인류사의 보물이니 있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카르나는 다시금 꽃병의 장미를 쳐다보았다. 장미는 아침과 별다를 바 없이 부드러운 향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티를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은 아서는 단정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영웅왕이 당신에게 이런 것을 보낼 정도라면……."


"?"


"역시, 그는 진심인 게 틀림없군요. 당분간 그 변덕은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해 안심했습니다."


"……."


"사실 당신과 그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들었을 때에는, 걱정했으니까요. 당신과 그 둘 다 격을 따지기 어려운 영웅임은 분명하지만, 두 사람의 조합 자체가 의외라."


"……그런가."




조합이 의외라는 것은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공통점을 찾기 어려우니까요. 그는 빼앗고, 당신은 베푸는 자. 그것만 생각해도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도 마냥 빼앗기만 하는 자는 아니다만."


"그건 역시 당신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아서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당신은 그를 보고 마냥 빼앗기만 하는 자는 아니라 하고, 그는 당신에게 그의 재보 안에 피어 있었을 장미를 가져다 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운 사이로군요."


"그건 부정하지 않겠다."


"행복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춰 놓았던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오븐의 소리가 들렸다. 카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븐 앞으로 갔다. 아서가 가져온 스콘이 포근한 버터와 달걀의 향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오븐 안에서 스콘을 꺼낸 그는 접시 한쪽에 클로티드 크림과 살구잼을 가득 얹고 스콘을 올려 식탁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카르나."


"네가 가져온 것이니까."


"그 영웅왕만 있었으면 절대로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서는 넌지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며 웃었다.




"사랑은 많은 변화를 불러오는군요. 당신에게도, 저에게도."








식사와 티 타임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딸기의 재배 방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딸기는 꽃도 열매도 예뻐 관상용과 식용 어느 쪽에든 적합한 식물이다. 아서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카르나는 그를 정원의 대문까지 나가 배웅했다. 


아서가 돌아가고 난 뒤 집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길가메쉬가 오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식당으로 돌아온 카르나는 식탁에 가 앉았다. 


꽃병의 장미가, 비스듬히 지는 노을의 볕을 받아 주황빛으로 빛난다. 마력을 한껏 머금은 장미는 하루가 꼬박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넘쳤다. 카르나는 손을 뻗어 그 여린 꽃잎을 쓰다듬었다가, 꽃병을 가까이 끌어당겨 향을 맡았다. 향에 취한다는 감각은 이런 것이겠지, 싶을 만큼 깊은 향이었다. 


꽃병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밀어놓은 카르나는 턱을 괴고 그 장미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최초의 재배 장미, 영웅왕의 보물. 이 장미는 그 칭호에 어울리는 향과 색과 생김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의 보고 안에 피어 있었을 이 아름다운 장미를 꺾어오는 길가메쉬를 상상하고, 카르나는 자신도 모르게 어려운 표정이 되었다. 


귀한 것을 받는 자는 받는 것의 격에 어울리는 사람이어야 한다. 카르나가 길가메쉬에게 그와 같은 장미를 주었다면 길가메쉬는 당연하다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상황에서, 카르나는 그 자신이 이런 깊은 호의와 애정에 걸맞은 사람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의 것이 아닐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며 받았을 때와는 역시 다르다. 때때로 엿보이는 길가메쉬의 마음은 카르나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깊은 적이 많았다. 


아직 길가메쉬가 올 때는 아니었으나, 바깥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나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확실히 조금 이른 귀가이기는 했다. 카르나는 현관까지 나갔다. 




"어서 와라."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길가메쉬가, 현관까지 나와 있는 카르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별일 없었느냐."


"그건 없었다."


"다른 게 있었군. 뭐냐." 




길가메쉬의 말에 카르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곧, 그에게 숨길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직격타에 길가메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대체 뭘 잘못 먹은 거냐."


"점심에 치킨 티카 마살라를 먹었다."


"그 얘기가 아닐 텐데?"


"……그런가."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냐, 고 하는 거다."


"내가 받은 장미가 귀한 것이라 들었다."


"당연하지. 네게 범용한 것을 줄 이유가 없으니까."




카르나는 길가메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을 찌푸리고 있으나, 새삼 눈앞의 남자는 터무니없을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반면 자신은.




"사용처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닌가."


"……."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카르나를 쳐다보던 남자가, 카르나의 이마로 손을 뻗어오더니.


검지 중지를 모아 있는 힘껏 튕겼다. 


따닥 하고 아플 정도의 소리가 났고, 실제로 아팠다. 불시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맞아버렸다. 카르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눌렀다. 




"아프다."


"멍청하긴."


"……."


"왕이 그의 재보를 쓰는 데에 말참견을 하는 자는 맞아도 싸다."


"……하지만 왕이라면 신하의 직언을 들을 줄도."




두 번째의 공격은 막아냈다. 




"감히 막아내다니."


"전사의 본능이다."




카르나는 불손한 어조로 대꾸하고는 막아낸 손을 잡아내렸다. 




"대답해 주지 않을 건가?"


"흥, 이 몸이 직접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문답이다."


"……."




길가메쉬는 손을 잡아당겨 빼냈다. 그리고 카르나의 옆으로 지나쳐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카르나는 그 자리에 서서 길가메쉬의 등을 바라보다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길가메쉬가 이런 식으로 피하는 게 한두 번의 일은 아니다. 


카르나가 막 식당으로 들어선 순간,


머리 위로 뭔가 가벼운 것들이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이렇다 할 정도로 충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카르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서 쏟아져 발치에 떨어지고, 그 위로 계속계속 쌓이고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장미다. 




"……??"




그것도, 오늘 아침 길가메쉬가 카르나에게 건네주었던, 그리고 카르나가 꽃병에 곱게 꽂아두었던 아름다운 황금색의 장미다. 그 장미가, 머리 위에서 쏟아지며 순식간에 카르나의 발등을, 무릎을, 허벅지를 파묻어버린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곧바로 사고가 쫓아가지 못해 카르나가 멈춰 있는 동안, 장미는 카르나의 배꼽 높이까지 쌓인 다음에야 멈췄다. 


식탁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길가메쉬가 있다. 그는 한쪽 눈썹 끝을 치켜올린 채 흥미롭다는 듯 카르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걸로 알겠느냐, 카르나."


"……."


"내 보물의 사용처는 내가 찾는다."




카르나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하나하나가 전부 그 장미들이다. 그러니까 길가메쉬는, 카르나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 장미를 카르나한테 쏟아부었다. 


카르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길가메쉬를 바라보았다. 




"말로 했더라면 이렇게 낭비하지 않았어도 되는 것 아닌가."


"……네놈 끝까지……."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길가메쉬의 표정은 여전히 신통치 않았지만.


카르나는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알기 어려운 인간이군."


"대체 누가 누구 보고 그따위 말을……."


"당연히 너다."




길가메쉬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걸 치우는 걸 도와주겠나. 이대로는 움직일 수가 없군."


"……네놈, 광대짓도 어지간히 해라."


"나는 광대가 아니다. 진심으로 하는 얘기다. 장미를 밟고 나갈 수는 없지 않나."


"하? 밟고 나오든가 알아서 해라!"


"날 이대로 여기에 버려둘 셈인가?"


"이……!"




다가온 길가메쉬가 파악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한번 휘둘렀다. 마술적인 조치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물리적이기 그지없는 것이었기에, 파헤쳐진 장미가 팔락거리며 흩날렸다. 




"그 방법 외엔 없었던 건가."


"네놈이 지금 내게 방법을 따지는 것이냐?"


"기왕이라면 고르고 싶군."


"거기에 평생 파묻혀 있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라!"




그리고 길가메쉬는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씩씩대며 걷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카르나는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는 꽃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꽃이 다치지 않게 나가려고 한다면, 한참이 걸리겠지. 그래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영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카르나는 그가 가버린 쪽을 돌아보려 몸을 내밀었다. 물론, 쌓여 있는 꽃더미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수월하진 않다. 


일단은 이걸 치우고 쫓아가자.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제멋대로지만,


그런 점도 꽤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