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야 #4
날짜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동안 카르나와 아르주나에게는 몇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그 간격은 도저히 좁혀지지 않았다. 카르나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아르주나는 그 이야기를 막았다. 다른 분위기로 전환될 만한 계기는 모두 무시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날을 이어갔다.
아르주나는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카르나에게 말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 몇 년에 걸쳐 부정해 왔어도 다 부정해내지 못한 것이 분명 남아 있다는 것. 그게 절대, 깨끗하고 마냥 아름답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할지,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어지는 것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컨트롤할 수 없는 감정을 원한 적은 없다. 그는 완벽하고 싶었다. 그의 삶은 여태까지 그가 원하는 대로였는데, 당장 지금이라고 해서 그렇게 달라져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카르나를 마주할 때면, 또는 마주하지 않을 때면, 여러 가지가 비틀려 맞물리지 않게 되었다. 고통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평상시의 그 자신으로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르주나는 가장 두려웠다. 아무렇지도 않고 싶었다.
……곧 헤어지게 될 테니까.
아르주나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곧 헤어지게 될 테니까.
볼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언젠가 이 마음도 자연히 소강 상태로 접어들겠지. 그렇다면 그때에는 다른 것으로 지우는 것도 어렵진 않을 거다. 아르주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회 임원들이 일을 방기하고 도망을 가든 얼굴만 비추고 학생회실에서 잠만 자는 날이 이어지든, 하루를 보내는 방식에는 관계없이 3학년들의 졸업식은 차츰 가까워져왔다. 학생회장의 졸업식 답사는 완성되었고 학생회로부터 보내는 졸업식 안내장이 3학년 학생 가정으로 배부되었다. 졸업식 공연을 준비하는 반도 있었고, 식이 끝난 뒤 어떤 이벤트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반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차츰차츰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아르주나의 학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매교이니만큼 카르나가 다니는 학교도 이쪽과 일정이 같다. 그러니 아마 그쪽도 여기와 상황이 비슷하겠지. 아르주나는 카르나와 헤어지게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쪽의 일상 속에서 문득 카르나도 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겠거니 하고 떠오르는 생각마저 막지는 못했다.
만약 여기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볼 일이 있었다면, 아르주나로서는 더더욱 괴로워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헤어질 것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불필요한 사건은 피로해질 뿐이다. 그런 면에선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다행이었다.
학생 때에 만났다. 그렇다면 헤어지는 것도 학생으로서.
그렇게 생각하고 아르주나는 졸업식까지의 남은 기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식 전날,
아르주나는 혼자 학교에 남아 있었다.
“후…….”
결국 학생회장이 쓰게 된 부학생회장의 송사를 마무리하며, 아르주나는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끝까지 부회장단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라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정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쫓아낼 걸 그랬다고 아르주나는 후회했다.
벽면의 시계는 새벽 1시를 넘겨가고 있었다.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여 시간만 더 늦어졌다. 아르주나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도 난방을 틀어놓은 탓에 실내는 건조했지만 이 시기의 밤에 창문을 열 엄두는 나지 않았다. 창문이 제대로 닫혔는지를 확인하고 아르주나는 난방을 줄였다.
돌아와 앉은 의자 바로 뒤쪽의 공간에는, 아직 박스 포장도 뜯지 않은 간이 침대가 놓여 있었다.
“…….”
그 대형 박스를 보며 아르주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아서 기사에게 쓸만한 간이 침대를 하나 사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물론 호텔에서 1박 하는 것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아르주나의 학교는 도심지에서 떨어진 산 위에 있다. 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묵을 만한 호텔이 있는 시내로 나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다 도저히 일이 언제 끝날지를 장담할 수 없었고, 그 상황에서 기사에게 무작정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물론 그는 아르주나가 그렇게 해 달라면 충분히 그렇게 했겠지만…….
아르주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박스에 손을 댔다. 그나마 1시면, 일찍 마무리 지은 편이다. 애매하게 불편한 숙소보다는 차라리 아예 불편한 곳이 낫다.
간이 침대는 반으로 접혀 들어 있었다. 기본적인 조립은 원래부터 되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기사가 해서 가지고 온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당히 눌러 펴자 그럭저럭 침대라 부를 수 있는 모양이 됐다. 커버가 이미 씌워져 있는 걸 보면 어쨌든 사람의 손은 한 차례 닿았던 모양이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아르주나는 자켓을 벗고 그 위에 누웠다.
생각해 보니 베개와 담요가 따로 있었다. 아르주나는 곧장 일어나 그쪽에서 베개와 담요를 꺼내왔다. 교복 차림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일 아침엔 기사가 새 교복을 가져올 거고. 또 교복 차림으로 잠을 잘 수 없는 그런 유형의 사람도 아니다. 베개를 베고, 아르주나는 그대로 담요를 덮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다.
학생회실에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는 것만 빼면.
아르주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담요를 덮고 누웠다.
불 꺼진 학생회실.
난방이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르주나는 반듯이 누워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카르나는.
아, 또 생각났다. 아르주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덜 피곤했던 모양이지.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쏘아붙였다.
그쪽은 그래도 이쪽보다 임원진이 나은 편이니까. 아마 이 꼴이 나지는 않았을 거다. 붙잡아 놓고 시키면 할 만한 사람들이니까. 물론 카르나가 그렇게 붙잡아다 놓고 시키지 않았다면 더 할 말은 없다.
가서 자고 있을까.
자고 있겠지. 꽃집 2층의 그 방이 떠오른다. 그 정말 사람 사는 것 같지 않던 집. 정말 생활하기에 있어 최저한도에 가까운 것들만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그곳의 살풍경함이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내일이 졸업식이다. 이제 새벽 1시가 넘었으니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르주나는 마른 입술을 물었다.
어쩌면 아무 생각도 없을지 모른다.
아르주나는 그와 조금이라도 빨리 멀어질 걸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을지 모른다. 아르주나에게 있어서 카르나의 생각은, 미지의 영역이니까.
그러나 기왕이라면.
그도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란다. 조금이라도 빨리 헤어지기를, 하고.
아르주나는 눈 위를 팔로 덮었다.
그래야 그 자신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이걸 견디지 못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에서 어디까지 무너지게 되는 걸까.
카르나는 언덕 위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잠깐 확인한 시각은 새벽 3시에 가까웠다. 가로등만 켜져 있는 길은 고즈넉하고, 서늘하다 못해 싸늘했다.
어쩌다 보니 일은 졸업식 전날까지도 끝나지 않았고, 당장 학교의 학생회실에는 머리를 싸맨 학생회 임원들이 모여 있다. 방학 내내 숙적을 무찌를 필살기를 연구한다던 2학년 부회장은 오늘에 와서야 대체 우리 학생회장을 뭐라고 말하며 보내야 하냐며 사자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 고민을 조금 더 일찍 해 줬더라면 좋았겠지만.
카르나는 학생회실에 모여 있는 멤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에 든 봉지들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모자라진 않겠지. 따뜻한 캔 음료들이 봉지 안에서 달강거렸다.
언덕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여길 이렇게 걸어다닌 게 벌써 3년이 지났다.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언덕을 걸어 올라가며, 카르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 드러난 보도블럭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었다. 줄곧 봐 왔던 풍경이, 이제 하루가 지나면 다른 이들의 것이 된다. 졸업식을 기념하듯 핀 벚꽃이 이따금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여러 일이 있었다. 카르나는 그렇게 회상했다. 이곳에서 만든 추억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보물 같았다. 사실은 이렇게, 졸업식 전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기뻤다. 피곤하기야 하지만 이것도 훌륭한 추억이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분명 웃음이 날 일이겠지.
만들었던 추억 하나하나를 떠올려가며, 카르나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 길을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
카르나는 오르막길을 올려다보았다.
“아.”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내려오고 있던 그도 카르나를 알아봤는지 발을 멈췄다.
“…….”
“아르주나.”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아르주나는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차는?”
“없어.”
“걸어가는 건가?”
“무슨 상관이야.”
“새벽이다.”
“……쯧.”
짜증스레 그가 혀를 찼다.
“네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군.”
아르주나 같은 사람이 이 시간에 운전수도 차도 없이 걸어간다는 건 무모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었다.
“참견 마라.”
아르주나는 이마를 누르며, 그렇게 쏘아붙였다. 카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아픈가?”
“…….”
카르나는 한 걸음 다가섰다.
“오지 마.”
“…….”
“됐어. 간다.”
손을 내린 아르주나가 성큼성큼 걸어 내려왔다. 그는 카르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려 했다.
“잠깐만, 아르주나.”
싫은 상대가 부른다면 무시하고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르주나의 고지식한 부분이었다. 발을 멈춘 아르주나가 불만스레 한숨을 내쉬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카르나는 아르주나의 앞까지 몇 걸음을 내려갔다.
“집까지 걸어갈 건가?”
“……왜 오는 거냐.”
“바래다 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카르나가 대꾸했다.
“짜증나니까 비켜.”
“이 시간대는 위험하다.”
“따라오지 마라.”
“내가 조금 더 앞에 서 있다.”
아르주나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바래다 주겠다. 굳이 두 번 말해야 하나?”
“…….”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카르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곧이어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카르나의 옆까지 다가왔다.
아르주나는 앞서 가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르나보다 뒤처지는 일도 없이 옆에서 걸었다.
올라왔던 언덕길을 다시금 내려간다. 보이는 풍경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건 조금 신기한 현상이었다. 이 시간대에 여길 걷는 게 처음이어서인지 발밑이 허했다. 땅을 밟고 내려간다는 실감은 없고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잘못하면 곧장 넘어질 듯해 카르나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왜 이제야 돌아가는 건가?”
영영 말하지 않을 것 같던 그가 대답했다.
“졸업식 준비.”
“이 시간까지?”
“네가 할 말인가?”
“너는 이미 끝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생각지도 않은 아르주나의 대꾸와 그 내용에 카르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가. 아르주나는 그보다도 내가 먼저 일을 끝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거기에서 대화의 마디가 끊긴다.
내리막의 절반 조금 더 아래에 이르러, 아르주나가 말했다.
“……넌,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거지.”
평이한 질문이었다.
카르나도 평이하게 단답했다.
“편의점.”
“다른 사람들은?”
“학교에 있다.”
“언제부터 네 신분이 심부름꾼으로 강등됐지.”
“내가 제일 할 일이 없었다.”
“…….”
두 번째의 마디가 다시 끊어졌다. 그대로 두 사람은 말없이 남은 길을 걸어 내려갔다.
이런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이다. 각자 할 말이 있으면 알아서 한다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결정사항이었고, 이 침묵은 그걸 따라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눈앞으로 꽃잎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졸업식을 코앞에 둔 풍경다웠다.
카르나가 중얼거렸다.
“곧 졸업이군.”
아르주나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할 필요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말, 계속 안 할 건가?”
“…….”
“궁도.”
카르나가 덧붙였다.
“……안 해.”
“시간이 없어서?”
“그래.”
“그렇게 바쁜가?”
아르주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런 줄도 모르고 걷던 카르나는, 몇 걸음 그를 지나쳐 걸어간 곳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르주나는 불빛 아래에 서 있었다. 키 큰 그의 발밑으로 야트막한 그늘이 생겨나 있었다.
아르주나가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말했을 텐데.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생겼다고.”
“…….”
“궁도를 그만둔 지도 오래됐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이유를 캐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아르주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감정이 담긴 행동이었다.
카르나는 담백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다,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야, 곧 헤어지게 되니까.”
“…….”
“하지만 네가 궁도를 한다면, 대회에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아르주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카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그를 보던 아르주나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카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냐니. 물어볼 것도 없을 만큼, 대답은 뻔하다.
“내가 대학을 꽤 먼 곳으로 간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되면 우린 서로 만날 일이 없어진다.”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대체.”
“하지만 궁도 대회라면, 네가 도 대회를 통과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회에서든 간에 가장 마지막엔 만나게 되겠지.”
“잠깐, 카르나.”
“나와 승패를 겨룰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무엇인가에 얻어맞기라도 한듯 아르주나는 눈을 홉떴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쳤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곧 그는 사나운 표정이 되어 카르나를 노려보았다.
“아르주나?”
“…….”
한참이 지나서야 아르주나는 피를 뱉듯 말했다.
“……카르나, 난 네가 싫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응, 알고 있다.”
“정말로.”
“응.”
“당장 네놈이 내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것도 자주 하던 말이었다. 카르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단 오늘은 널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준 다음, 원하는 대로 사라져 주겠다. 그럼 되겠지.”
너무나도 평상시에 이루어지던 대화 그대로다. 하지만 그 어조에 더더욱 화가 났는지, 아르주나는 울컥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라, 사람을 무슨 어린애 다루듯이……!”
“? ……오해다, 아르주나. 나는 널 존중하려는 것뿐이다.”
“존중? 네놈의 그 태도가 존중이라고 하고 싶은 거냐!”
지금의 상황은 아무리 봐도 그 말이 아르주나의 분노를 산 것 같았다. 카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까지도 평상시의 대화 흐름이기는 했지만.
가끔 이렇게 자신의 뜻이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음이, 안타깝기도 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차라리 네놈은 말을 하지 마라.”
아르주나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거기에서 더 대꾸할 수 없어 카르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나서 아르주나는 카르나를 지나쳐 한참 앞을 걸어갔다. 그 뒷모습만 봐도 어지간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뭐라 말한들, 지금으로선 그의 화를 돋우게 되는 것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카르나는 그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 뒤를 쫓아가기 위해 카르나는 빠르게 걸었다. 어쨌든 그를 바래다 주려면 놓치지 않아야 했다. 계속 걸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두 사람은 언덕 아래의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발을 멈춘 아르주나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를 따라잡기 위해 빠른걸음으로 걷고 있던 카르나는 하마터면 멈춰선 아르주나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아직도 쫓아올 셈이냐?”
비틀거리며, 카르나도 멈춰섰다.
“…….”
“이제 됐지. 가라.”
새벽 3시의 주택가다. 가로등이야 켜져 있었지만 사람이 다니는 시간은 아닌지라 주위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 거니까.”
“……그런가.”
“당연한 얘기는 하지 마라. 애초에 나 혼자서도 못 올 길이 아니었는데 네놈이 마음대로 끼어들었을 뿐이지 않나.”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라면, 여기보다 좀 더 사람이 있을 법한 곳까지 바래다주는 거였지만.
“됐으니 빨리 가.”
“…….”
카르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면 내가 가겠다.”
카르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아르주나가 몸을 틀었다. 카르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노골적일 정도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아르주나가 카르나를 돌아보았다.
“대체 이번엔 또 뭐냐.”
“잠깐만.”
카르나는 그의 팔을 놓고, 다른 손목에 걸고 있던 봉지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캔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
아르주나는 내밀어진 캔과 카르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추우니까.”
그렇게 덧붙이자, 아르주나는 마지못해 그걸 받아들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방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됐지. 간다.”
“……미안하다.”
그가 몸을 돌리기 전에, 카르나는 재빠르게 말했다.
“내가 너를 어린애 취급한다고 느끼게 한 것.”
“…….”
“내 부족함으로 인해 네게 불쾌한 감정을 안겨준 것 같군.”
아르주나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끝까지 하고 싶었다. 말을 오래 멈추고 있으면 그가 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너는 내게 있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다. 그것만은 진실이다.”
그렇게 말하고, 카르나는 슬쩍, 아르주나를 쳐다보았다.
아르주나가 굳어 있었다.
아까 전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생각 외의 반응에 카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주나?”
“지금 뭐, 라고.”
“?”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내게 있어 네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 말인가?”
“?”
“?”
두 사람은 서로 한참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겠는 것은 카르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에 한 말은 틀림없는 진심이었고 오해될 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르주나의 반응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카르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르주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또 실수를.”
“……아니, 됐다.”
아르주나는 가방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됐다니, 아르주나.”
“네놈이 하는 말이니까 또 분명 다른 뜻이겠지. 뻔해. 됐다.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르주나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가라. 나도 갈 테니까.”
“…….”
카르나는 그 자리에 서서, 걸어가는 아르주나의 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카르나는 한참 그 등을 바라보다가 발을 돌렸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새벽은 처음이었다.
신발도 안 벗은 채로 현관에 멍하니 서 있던 아르주나는, 현관등이 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주택가에서 어떻게 걸어나와서, 택시를 잡으려다가 결국 운전기사에게 전화했던 것은 기억이 났다. 기사는 불평 한 마디도 없이 십여 분만에 아르주나가 있는 곳까지 왔고, 그를 태워 집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지금인데.
도저히 주택가에서 무슨 정신으로 걸어서 나왔는지까지가 기억에 없었다. 아르주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
일단 목이 말랐다.
주방으로 들어간 그는 컵에 찬물을 가득 따라 마셨다. 기왕이면 그 찬물에 각성 효과가 있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고 조금 전까지 히터 바람을 맞다가 갑자기 찬물을 잔뜩 마셔선지 머리가 아팠다.
아,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질 모르겠다. 아르주나는 비틀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테지만 적당히 가방을 던져두고, 그는 양말도 신은 채로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그대로 엎드려 자려다가, 아르주나는 가방에 핸드폰이 들어 있다는 걸 떠올리고 다시 비척비척 일어났다. 알람을 맞춰놓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대로 자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하필이면 가방을 또 문가에 버려두고 와서 거기까지 가야 했다.
가방이 있는 곳까지 온 아르주나는 그 앞에 앉아 지퍼를 잡아당겼다. 불을 켜는 것도 귀찮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가방 안으로 손을 쑤셔넣었다. 손가락에 무언가 둥근 것이 닿아 아르주나는 의아해하며 그걸 꺼냈다.
“아.”
아까 카르나에게 받았던 캔음료다.
받았을 때도 그렇게 따뜻하다고까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열기를 잃었다. 아르주나는 다시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3시 반. 여기서 최대한 늦게 나간다 치면 8시까진 잘 수 있다. 지금은 아침식사보다 잠이 더 중요하다. 아르주나는 뻑뻑한 눈을 깜박여가며 알람을 맞췄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고 침대로 가려다가, 발을 멈췄다. 바닥에 세워둔 캔을 집어든 그는 방 밖으로 나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음료가 뭔지는 냉장고 문을 열고 나서야 알았다. 복도에 불도 켜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캔을 넣으려던 아르주나의 손이 뚝 멈췄다.
그건 아르주나가 자주 마시던 초콜릿 음료였다.
그 순간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찬물을 마셨을 때에도 느껴지지 않았던 감각이,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쏟아졌다.
아르주나는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삐, 삐, 하고 냉장고가 울 때까지.
생수병만 들어 있는 냉장고의 냉장칸에 그 음료를 집어던지듯 밀어넣고선, 아르주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텅, 하고 답답하게 문이 닫혔다.
뭘 본 거지. 믿을 수 없는 것은 그걸 직접 본 아르주나 본인이 더했다. 그는 멍하니 어둠 속에 서 있다가,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
그 음료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아르주나는 다시 문을 닫았다.
“……아.”
아르주나는 세 번째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냉장고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뺨과 귀가 화끈거렸다. 아. 아르주나는 뒷머리를 냉장고 문에 부딪쳤다. 아팠다. 그러니까 꿈도 아니다.
아르주나는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이게 대체.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아르주나는 냉장고를 부여잡고 어떻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망치듯 침실로 갔다.
침대에 엎드린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의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켰다. 환하게 켜지는 디스플레이 때문에 눈이 부셨다. 아르주나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핸드폰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눈을 비볐다.
손 안에 진동이 느껴졌다.
아르주나는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메시지 착신. 발신인은 카르나였다.
『TITLE : 잘들어갔나
걱정하고있다』
늘 그랬듯 띄어쓰기도 마침표도 없는 메시지다.
화면을 쳐다보던 아르주나는 답장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작성했다.
『TITLE : (없음)
집.』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한참이 지나 답장이 왔다.
『TITLE : 다행이다
잘자라』
평소의 흐름대로라면 여기서 끊고 잤겠지만.
『TITLE : 너는
학교?』
하나를 더 보냈다.
다음 답장은 좀 더 빨리 왔다.
『TITLE : (없음)
응』
아르주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답장 버튼을 눌렀다.
『TITLE : (없음)
이따 봐.』
그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뒤집어 놓은 아르주나는 베개를 반듯하게 베고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달리기를 하고 난 다음처럼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빠르게 맥박치는 소리를 들으며, 아르주나는 애써 심호흡을 했다.
그 뒤로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수마가 다시금 밀려왔다. 아르주나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어렴풋, 진동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아르주나가 스스로 깨어날 수도 없을 만큼 깊은 꿈으로 끌려가고 난 다음이었다.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 꿈엔 카르나가 나왔다.
『TITLE : (없음)
이따보자』
아침 7시 반, 아르주나는 그 메시지가 떠 있는 핸드폰을 들고 운동장에 서 있었다.
언제 봐도 훌륭한 트랙이 깔린 운동장이다. 다른 것은 별로 부럽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이 학교의 이 운동장만큼은 부러웠다.
트랙을 뛰고 있던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주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넣곤, 그를 쳐다보았다.
“여긴 무슨 일인가, 아르주나.”
체육복 차림의 카르나다.
아르주나는 대답 대신 카르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한번 쭉 훑었다.
“…….”
“아르주나, 무슨 일이라도?”
“왜 체육복인 거냐?”
“그야, 교복을 입고 뛸 수는 없으니까.”
“졸업식날인데, 오늘.”
“알고 있다.”
아르주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카르나의 체육복 차림을 더 이상 지적하지는 않았다. 더 얘기해 봐야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받아라.”
“?”
대신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내밀었다.
카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편의점 마크가 찍혀 있는 봉지를 받아들었다.
“뭔가?”
“보면 알아.”
“?”
봉지를 받아든 카르나는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샌드위치?”
“보나마나 아침 안 먹었겠지.”
“응.”
“…….”
“그래서 이건 뭔가?”
“샌드위치잖아.”
“그러니까, 이걸 왜.”
“먹으라고.”
아르주나가 그렇게 쏘아붙이자, 카르나는 그제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는 듯, 그러나 아르주나가 왜 이걸 주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내가 먹으면 되는 건가?”
“……내가 너한테 샌드위치를 주면서 네 부회장들에게 갖다주라고 할 것 같나?”
“그건 아니다.”
“그런 비효율적인 짓은 안 해.”
“응, 그렇지.”
카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덧붙였다.
“네게 뭔가를 받는 건 오랜만의 일이군.”
“…….”
아르주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상황적으로, 이 행동이 무척이나 부끄럽고 머쓱하고 괴로운 한편,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자꾸 온갖 생각이 다 났기 때문이다.
“기쁘다.”
그 말에, 아르주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르나가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 웃고 있다. 아르주나는 눈을 깜박였다.
카르나는 아르주나로부터 뭔가를 받는 게 오랜만이라고 했지만, 아르주나야말로 이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아무런 대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너는 아침식사를 했나?”
“……아.”
“아직 안 먹은 거라면, 같이 먹는 건 어떤가.”
카르나는 봉지를 들어보였다.
“나눠먹으면.”
아르주나는 잠깐 당황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재빠르게 답했다.
“먹, 먹었으니까.”
“정말인가?”
확실함을 표시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나는 아쉽다는 듯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르주나는 입술을 꾹 닫은 채 몸을 뒤로 물렸다.
“……줬으니까, 간다.”
“벌써?”
“벌써라니.”
“…….”
하지만 카르나는 곧 어깨를 으쓱했다.
“아, 너도 바쁘겠지. 샌드위치는 고맙다.”
“바쁜 건 아니지만 볼일이 끝났으니까.”
“응.”
아르주나는 카르나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폈다. 확실히 새벽에 비해 그 얼굴엔 무른 빛이 돌고 있었다. 미소짓듯, 부드럽게 내려간 눈매.
“아.”
“?”
“그러고 보니.”
불쑥, 카르나는 손을 내밀었다.
“졸업, 축하한다.”
그리곤 그렇게 말했다.
아르주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손을 마주 내밀지도 못하고, 완전히 얼어버린 채로.
그건 정말이지 아르주나에겐 너무할 정도의 엄청난 직격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