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카르ジュナカル

선로 위에서, #상

||||||||||||| 2018. 7. 7. 01:50

현대 AU. 화가 아르주나. 러시아의 트랜스 시베리안 열차 소재(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










  날이 맑았다. 널찍한 창문을 통해 시린 햇살이 가득 스며들었다. 기차에서 맞는 마지막 아침이었다. 아르주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난 11일에 모스크바를 출발한 블라디보스토크행 트랜스 시베리안 열차는 위도 기준점을 일곱 번 지나 이제 완연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시간에 이르고 있었다. 이불 아래에서 아르주나는 베개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이곳의 오전 여섯 시는 모스크바의 밤이다. 지나온 옛밤. 


  아르주나는 눈을 가느스름히 떠 액정을 바라보았다. 무기질적인 배경화면에 밤 동안 읽지 않은 메일이 이십여 건 가까이 쌓여 있었다. 목록을 대강 훑어 본 다음 그는 다시 핸드폰을 베개맡에 돌려놓았다. 다시 잠들기엔 눈이 부시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아르주나는 한참을 뒤척였다. 도착 예정 시각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라디오를 틀자 러시아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몇 번 채널을 돌린 다음에야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음악은 편하다. 가사는 잘 몰라도 멜로디는 알 수 있었다. 속삭이는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르주나는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미리 맞춰뒀던 알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주일 내내 서로 얼굴을 본 승무원이었다. 그녀가 딱딱한 영어로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한 시간 남았어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사무적인 태도로 다시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아르주나는 그녀가 나가고 나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잤는데도 몸은 개운하질 않았다.


  화장실은 한 량의 끝과 끝에 하나씩 있었다. 밤 내내 들렀던 역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난 다음이라 순서는 금방 돌아왔다. 좁은 개수대에 한껏 몸을 구부리고 서서 아르주나는 얼굴을 씻었다. 목덜미와 턱 아래까지 꼼꼼히 닦아낸 다음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거울 속의 남자는 초췌하긴 했지만 아주 못 봐 줄 정도의 꼴은 아니었다. 턱을 몇 번 매만진 아르주나는 수건을 목에 두르고 화장실을 나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그는 좁은 복도를 걸어 자신의 쿠페 칸으로 돌아왔다. 


  4인실임에도 불구하고 칸에는 그 말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이제 남은 역이 없으니 남은 시간 동안은 혼자 쓰는 셈이다. 아르주나는 침대의 매트리스 부분을 들어올렸다. 열차의 침대는 피아노 의자처럼 그 아래가 텅 비어 있어서 짐 따위를 넣을 수 있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아르주나는 옷걸이에 길게 걸려 있는 양복과 코트를 꺼냈다. 그리고 품이 헐렁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벗고 정장 바지와 와이셔츠로 갈아 입었다. 벨트를 채우고 셔츠 자락을 안으로 넣은 다음 아르주나는 타이를 맸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알람은 아니었다. 다소 성급하게 울려대는 벨소리가 옆방까지 들릴까봐, 아르주나는 재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선생님?]




  아르주나는 어깨와 턱 사이에 핸드폰을 낀 채 타이의 매듭을 마무리 짓고 침대에 앉았다. 전화를 건 것은 화랑의 젊은 매니저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직 메일 안 보셨죠.]




 영국인과 러시아인의 혼혈인 그녀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어딜 가든 모국어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 나라에서 완전한 이방인인 아르주나에겐 조금 괴로운 일이었지만, 영어로라도 이 땅의 누군가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르주나는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방금 막 일어나서 씻고 들어온 참입니다. 제가 일단 이 전화를 끊고 메일을 읽고 난 뒤에 다시 전화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조금 번거롭더라도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핸드폰 너머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전화를 끊고 메일을 보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르주나는 창밖을 흘끗 내다보았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3층 제4보관실의 에어컨디셔너에 누수가 있었어요. 일단 확인하자마자 바로 기사를 불러서 그림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수리하게 했는데……. 그림의 손상 정도는 선생님이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보기엔 두 점 정도는 확실히 작업이 필요할 거 같아요.]




  이번에는 아르주나가 한숨을 내쉴 차례다. 




  "……안에 몇 점이나 있었는데요?"


  [다섯 점이에요, 인물화. 바로 돌아올 수 있으시겠어요?]


  "잠깐만."




  아르주나는 발치에 내려놨던 화구 가방 안에서 일정표를 꺼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는 것은 딱 하루였다. 그 하루 동안 해야 할 일들과 가야 할 곳들이 빼곡하게 적힌 일정표를 보며, 아르주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쪽의 클라이언트들과 만나는 것은 나중에 메일이나 전화로 대신한다 하더라도, 내일 아침에 있는 시상식에는 그 본인이 직접 참석해야만 했다. 




  "빠듯하겠는데. 일단 시상식 일정 때문에라도 안 되겠습니다."


  [그럼 선생님 일정 끝나시는 대로 바로 타실 수 있게 비행기편이라도.]


  "날짜가 너무 급박해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당겨 보긴 할게요."




  이쪽에서의 출발 시간과 모스크바 도착 시간, 그리고 문제가 된 에어컨디셔너의 상황과 그림의 상태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눈 다음에야, 매니저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옮긴 그림들 보관은 부탁하겠습니다. 작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가서 볼 테니까."


  [그럼 출발할 때 메일 보내주세요. 퇴근하고서도 확인할게요.]




  아르주나는 핸드폰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목 뒤를 주물렀다. 




  "그럼 슬슬 끊을게요. 짐 챙겨야 해서."


  [네. 그럼.]




  전화를 끊고 나서 아르주나는 핸드폰의 액정에 떠 있는 메일함을 열었다. 제일 위의 다섯 건이 화랑 메일로 온 것이었다. 가장 먼저 온 것을 열어보자 메시지가 반 정도 잘려 있었다. 어지간히도 급했는지 내용을 쓰다가 엔터를 쳐서 잘못 송신한 모양이었다. 두 번째 것에는 잘못 보냈던 앞의 메일에 대한 수습과 보충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화로 말했던 대로, 에어컨디셔너가 고장나는 바람에 보관 중이던 그림에 하자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아르주나는 세 번째 메일을 열었다. 그림을 옮긴 후 확인한 다음에 보낸 것인지, 세 번째 메일은 좀 더 자세했다. 가장 눈에 띄게 손상된 그림은 두 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썩 맘에 들지 않던 그림들이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메일은 똑같은 내용에 언제 메일을 확인하시는 거냐는 말이 첨언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들도 전부 확인한 다음 아르주나는 화구 가방에 일정표를 돌려넣었다. 대신 지갑에서 출발할 때 끊었던 왕복 기차표를 꺼냈다. 


  원래대로라면 모레 저녁에나 느긋하게 출발할 생각이었다. 아르주나는 턱을 괴고 손에 쥔 티켓을 쳐다봤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시상식에만 갔다가 바로 출발한다면, 점심 무렵을 전후해서는 모스크바행 기차를 탈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출발 시각을 확인하고 기차표의 시간을 앞당기는 건 일단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한 뒤에 하기로 하고. 거기까지 생각하고선 아르주나는 이마를 꾹 눌렀다.


  더 생각하기가 귀찮았다. 간만에 경험하는 느리고 편안한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일이 마냥 그렇게만은 돌아가지 않을 모양이다. 








  더운 나라에서 나고 자란 그는 추위에 썩 익숙지 않다. 러시아에 처음 왔던 때에는 심한 폐렴을 앓기도 했었다. 꼬박 한 달을 앓고 일어났을 때엔 러시아의 겨울도 다 끝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러시아 도시의 공기에서 느껴지는 메마른 먼지의 냄새와, 눈의 냄새 같은 것을 좋아했다. 


  아르주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끄무레한 겨울 하늘이 플랫폼의 철창 같은 지붕 사이로도 드문드문 보였다. 가만히 서 있었던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치고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얼마간 그곳에 계속 서 있었을 것이었다. 아르주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역을 향해 걸었다. 




  "모스크바행 기차 예약을 했는데."




  창구의 유리 너머에서 역무원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티켓은 이겁니다."


  "그래서요?"




  티켓을 건네받은 역무원이 그것을 앞뒤로 돌려보았다. 아르주나는 기차 시간을 좀 당기고 싶다고 말했다.




  "몇 시."




  러시아인들 특유의 무뚝뚝함에는 익숙했다. 보통 여행객이라면 불만스럽게 여길 만한 역무원의 대응에도 아르주나는 능숙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 점심 무렵이요."


  "오후 1시 20분. 그거 타려면 이거 환불하고 다시 예매해요."


  "몇 인실입니까?"


  "몇 인실을 원하는데."




  똑같이 쿠페라고 대답하자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쿠페는 비어 있는 칸이 없어요. 쁠라쯔 카르따, 아니면 룩스."




  아르주나는 쁠라쯔 카르따의 환경을 떠올렸다. 개방형의 6인실은 개인 화물을 간수하는 것만도 큰일이다. 거기다 그는 시끄러운 곳보다는 조용히 쉬고, 작업을 할 만한 곳이 필요했다. 




  "룩스로요."


  "룩스는 2인실이요. 비싸고."


  "압니다. 룩스로 해 주세요."




  역무원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아르주나의 티켓을 환불해 줬다. 아르주나는 카드를 건넸다. 그가 새 티켓과 환불금액을 같이 아르주나의 앞에 밀어놓았다.




  "고마워요."




  아르주나는 금액을 확인한 후 창구 앞을 떠났다. 


  예약한 호텔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었다. 러시아에의 정착을 고려하며 오가던 때에도 몇 번 묵었던 호텔의 분점이다. 택시에서 내려 바쁘게 홀로 들어서자마자 온기가 느껴졌다.


  아르주나는 머플러를 벗어 팔에 걸었다. 간단하게 체크인을 끝내자 벨 보이가 따라와 가방을 들어 주었다. 아르주나는 순순히 그것을 건넸다. 별로 무겁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에 익숙했다.


  방까지 올라온 다음, 아르주나는 가방을 들어 준 벨 보이에게 팁을 쥐여 주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되었을까 싶은 그는 서투른 영어 발음으로 감사합니다 미스터, 라고 말하곤 방 밖으로 나갔다. 일련의 예의 같은 과정을 끝내고 나서야 아르주나는 침대 아래에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필통을 꺼냈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댄 그는 새로 작업할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가장 손상이 큰 두 점의 인물화다. 돌아가자마자 작업을 한다 해도 그는 손이 느린 편이라 완성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다리를 반대로 꼬고, 아르주나는 연필을 깎았다. 발끝에 걸리는 벨벳의 느낌이 부드럽고 포근했다.


  한 명의 외국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 혹한의 땅으로 들어오게 한 데에는 러시아가 지닌 풍광의 영향도 있었다. 당연했다. 러시아에는 그 광활함이 지닌 매력이 있다. 원초의 추위와 맞닿은 이들이 세운 역사나 문화, 그리고 엄숙함.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었다. 당연하다. 그것뿐이었다면 아르주나는 러시아에서 영영 살겠노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념 끝에 고개를 들자, 종이 위에는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아르주나는 흑연이 새까맣게 묻은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손에 밴 버릇 같았다. 그리고 그는 스케치를 다시 바라보았다. 선이 가는 남자의 옆얼굴이었다. 머리카락에 가려 생김은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단어의 개념처럼.


  십 년이 지났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되풀이했을 그의 목소리나 손끝에서 약하게 나던 향기는 다 잊었어도, 아르주나는 그의 얼굴이며 그가 두르고 있었던 분위기를 다 기억했다. 행여나 잊을세라, 그의 목소리와 향기보다 먼저, 그 자신이 잡아 둘 수 있는 형태로 늘 옆에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아르주나는 스케치 밑에 자신의 서명을 넣고 커버를 덮었다. 하지만 그것은 팔 수 없는 그림이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수천 장이었다. 이 그림도 영원히 이 속에만 있게 될 것이다.


  스케치북을 내려놓은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눈 안쪽에 그가 있는 듯했다. 미소짓고 있었다. 남자가 한 손에 트렁크를 든 채 손을 흔들었다. 




  「До свидания.」








  시상식은 단출했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다. 참가한 아티스트들과 심사위원들을 위한 브런치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지만 아르주나는 자리를 빠져 나왔다. 갤러리에 보관하고 있었던 그림에 사고가 생겼다고 하자 다들 조금씩은 이해해 주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그렇게 서둘러 가야 하느냐는 내용의 질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식장을 나오면서 간밤에 연락할 수 없었던 클라이언트들에게 연락을 넣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일 년 동안 할 사과를 하루 내내 한 기분이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에는 버스를 타지 않고 곧장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가 몇 번 길을 돌아 가려는 것을 잡고 영어로나마 몇 마디 하자 기사가 핸들을 꺾었다. 그대로 갔으면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는 한 시간도 더 걸릴 뻔했다. 어디든 외국인에게 마냥 친절하기만 한 도시는 없다. 아르주나는 창밖으로 지나쳐 가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역 앞 카페에서 아르주나는 커피 한 잔과 흰 빵 하나를 샀다. 시간은 얼추 맞았다.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굳기 직전의 빵을 씹어 삼키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에서는 탄 맛이 났고 흰 빵은 버터가 발라져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아침을 거른 그에겐 어떤 것도 괜찮게 느껴졌다. 거기다 일주일 가까이 카페인을 섭취하지 못 하던 중에 마신 커피 몇 모금이 피곤한 정신을 두들겨 깨웠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컵과 빈 빵봉지를 치웠다. 주머니에 넣어 놓은 영수증도 찢어서 휴지통에 버리고 나자,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빠른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것저것을 버리고 가는 기분이다.


  플랫폼에 내려서기가 바쁘게, 눈이었다. 영 흐리던 하늘에서 점점이 눈발이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아르주나는 가방을 고쳐 메며 코트깃을 여몄다. 플랫폼에 선 승객들 중 그와 꼭 같이 몇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굵은 눈은 아니었다. 가루눈. 쌓이지는 않을 것 같다. 아르주나는 머플러에 코를 묻었다. 


  열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승무원이 티켓과 신분증을 확인했다. 아르주나는 예의상 웃는 얼굴로 그녀가 다시 건네주는 티켓과 신분증을 받아 들었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르주나는 그녀가 비켜주는 대로 열차에 올랐다. 창가에 조금 가까이 다가서자 입김이 금세 창문에 서렸다. 


  꼭 이렇게 눈이 왔었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좁은 복도를 걸어 지났다. 칸을 잘못 찾은 몇몇 여행객이 역방향으로 그의 옆을 스쳐갔다. 그것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들지 않는데, 과거의 어느 순간에 있었던 일만 생생했다. 무엇이든 한 사람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은 안 좋은 버릇이었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연상은 일종의, 당연성을 지닌 것이기까지 했다. 


  생각. 그리고 예약했던 호실의 문을 열자,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아르주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방을 위쪽의 선반에 올리고 난 뒤 남자가 아르주나 쪽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풍경과, 그와. 아르주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데도 멈춰 있는 그 가운데. 남자가 말했다. 




  "Здравствуйте."




  그러나 그 목소리는 조각조각이 되어 귓속을 흘러 나갔다. 모든 것들이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렸다. 아르주나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는 정체(停滯) 속에 서 있었다.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인사를 했는데도 상대가 묵묵부답일 때에 보일 법한 흔한 반응이었다. 아르주나는 그제서야 당황해서 자신도 러시아어로 인사했다. 




  "Здравствуйте."




  러시아에 체재한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발음은 아직도 신통치 않았다. 남자는 아르주나가 러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선 짧은 눈인사로 대답했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여전히 문간에 선 채로 그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쿠션을 치우고 남자는 소파 겸 매트리스 위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손짓했다. 




  "들어와도 된다."




  남자가 영어로 말했다. 


  아르주나는 태엽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남자가 들어오라고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가 들어오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아르주나는 언제까지고 거기에 서서 남자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존재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지만, 이상했다. 세상에는 가장 진부한 표현이 가장 정확할 때가 있는 법이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눈을 기쁘게 믿어야 할지, 아니면 스스로의 감각을 의심하며 그를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건 정말 괴로운 선택이었다. 


  남자는 부자연스럽게 걷는 아르주나를 조금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납득했는지는 아르주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남자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아르주나는 짐을 풀면서 몇 번이나 남자의 얼굴을 흘끔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면 난감했을 것이다. 아르주나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아르주나는 옷을 다 갈아입고 침대에 앉았다. 남자가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꽤 느렸다. 시간도 많으니 서두를 것 없다는 모양새였다. 아르주나는 올 때와 같이 발치에 치워둔 화구 가방에서 크로키 북을 꺼냈다. 칼을 꺼내 연필을 깎는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남자는 책 너머로 살짝 얼굴을 들어 아르주나를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고서는 다시 별다른 말 없이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주나는 최대한 일상적인 것처럼 행동했다. 사각대면서, 뭉툭하게 무뎌졌던 부분들이 깎여 나간다.


  기억의 군더더기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이 있다.


  아르주나는 병 안에 연필 깎은 뒤의 부스러기를 털어 넣었다. 탁탁, 하고 종이를 털어내는 소리에도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소한 소음이 울렸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기차는 낮게 덜컹거리면서도 안온하게 풍경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과거를 향해 간다. 생각해 보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것은 그런 여행이었다. 지나온 시간들로 다시 돌아가는.


  그리고 지금 그는 그 가운데에 있었다. 그도 모든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십 년 전. 몇 번이나 꿈꾸고 그렸던 시간 속으로.


  ……그러나 당신은?





  



  "저녁 같이 드시겠습니까?"




  남자가 번쩍 눈을 떴다.




  "……아."




  그는 무어라 러시아어로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옆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동행하게 된 사람이 러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낸 눈치였다. 남자는 얼굴에 묻은 잠 기운을 털어내듯 몇 번 고개를 흔들고, 입을 열었다. 




  "어……, 뭐라고 했지."


  "저녁이요."




  그의 눈이 자연히 창밖으로 향했다. 차가운 겨울의 땅에 밤이 찾아오는 것은 늘 빠르다. 




  "……역 지났나?"




  역의 이름을 말하는 그의 러시아어 발음이 지나치게 유창했기 때문에 무슨 역을 지났냐고 묻는지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최대한 비슷한 지명을 들은 기억을 떠올려 대답했다.




  "아마도 한 시간쯤 전에."




  열차 내의 식당 칸은 값이 비싼 편이다. 트랜스 시베리안을 이용하는 승객들 중에는 역에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좌판을 펼쳐 놓고 있는 잡상인들로부터 간단한 도시락이나 그 외의 먹을 것을 사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남자도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인지 모른다.




  "저도 깜박 잠드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서."




  아르주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사실은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놓친 것이었지만 그런 부분까지는 설명할 필요 없겠지.




  "다음 역까진 좀 많이 남은 것 같아서……. 전 식당 칸에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하시죠."




  남자는 다시 창밖을 쳐다보며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 고갤 가볍게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식당 칸에 도착했을 땐 거의 마지막 주문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왔다. 아르주나는 러시아식 빵과 보르시치를 주문했다. 남자도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가고 나자 칸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겨졌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남자는 가만히 허공을, 아르주나는 테이블의 모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 둘이 공통적인 이야깃거리로 삼을 만한 것이란 그닥 없다.




  "……그쪽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아르주나의 물음에 남자가 시선을 내렸다.




  "거의 모스크바까지. 세 역 전. 코스트로마."




  그의 시선이 그쪽은, 하고 되묻는 것 같았다. 




  "계속 얼굴을 보게 되겠군요. 저는 모스크바까지."


  "그런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주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사람이 계속 바뀌면 좀 불편하거든요."


  "음."


  "다행입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


  그 마지막 손님들을 빨리 내보내고 싶다는 의지가 어떻게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문한 것은 금방 나왔다. 식기가 부딪는 소리가 침묵을 대신했다. 아르주나는 빵을 작게 뜯어 보르시치에 찍어 먹었다. 빵이 좀 차가웠지만, 넘길 만은 했다. 


  웨이터가 빈 그릇을 치울 무렵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못했군."




  말을 꺼낸 것은 남자였다. 아르주나는 씹고 있던 것을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아르주나입니다."


  "외국인인 것 같은데, 여행 중인 건가."


  "외국인은 외국인입니다. 지금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지만."


  "그렇군."




  그리고 남자는 한 발 늦게 자기소개를 했다.




  "카르나다."




  아르주나는 살짝 웃었다. 카르나. 


  ……카르나.




  "트랜스 시베리안은 처음인가?"


  "아뇨. 일 때문에 꽤 많이. 여행으로도 여러 번 왔다갔다 했지만요."


  "그렇군."


  "……미스터 카르나는, 여행 중인 겁니까?"


  "미스터는 빼도 된다."




  아르주나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카르나가 덧붙여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방학이라서."


  "방학?"


  "음, 아직 학생이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르주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의외라는 얼굴이군."


  "실례.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아서요."


  "그런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학생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으니까."


  "……."


  "사정이 있어서 학교를 좀 오래 쉬었다. 제적도 한 번 됐었고."




  아르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 쉬었다, 제적 등의 단어가 머릿속에서 날아다니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기억 속의 그는 아르주나보다 세 살이 많았고 그때도 대학생이었다. 아마 그때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상대가 아르주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은 이상,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이상은 아르주나 역시 깊이 파고들 수 없다. 그저 그렇군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선 뒤의 계산은 아르주나가 했다. 학생에게 돈을 내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자, 카르나는 난감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역시 아르주나가 현금을 먼저 건네버린 뒤에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법이다. 카르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네게 신세를 졌군, 하고 말했다.


  식당 칸을 나와, 올 때에도 지나왔던 좁은 통로를 다시금 걸었다. 창 바깥으로는 어둡고 차가운 밤만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네?"




  뒤를 돌아보며 카르나가 말했다. 




  "아까 전부터 궁금했던 거지만. 혹시, 우리 어디에서 만난 적 있었나?"


  "……글, 쎄요……."




  아르주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 기미를 눈치채지도 못 했는지, 카르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왠지 낯익은 느낌이라."


  "그렇습니까……."


  "왜인진 잘 모르겠지만."


  "……하하, 작업 멘트라면 구식이긴 하네요. 식사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니라면 미안하다."




  카르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이며, 그가 앞을 걸어간다. 아르주나는 그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어쩐지, 마음이 따끔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