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카르ギルカル

함부로 표류하기를, (카르나TS)

||||||||||||| 2018. 7. 27. 01:26

* 어느 날 남자를 줍게 된 회사원 카르나TS와 그런 카르나한테 주워진 길(가메쉬) 이야기. 여차저차해서(...) 이미 사귀고 있습니다.

 









  횡단보도 너머에, 그가 서 있다. 


  마스크에 후드까지 쓰고 있지만 카르나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길이다. 어깨에서 미끄러지는 가방을 추스르며 카르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곧 횡단보도의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카르나는 바쁘게 그가 있는 곳까지 뛰어갔다. 




  "오래 기다린 건가."


  "아니."




  길이 손을 뻗어와 카르나는 그 손을 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이 손등까지 감싸온다. 카르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스크를 슬쩍 턱 아래로 끌어내린 길이 몸을 숙였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오늘은 뭘 했나."


  "집에 있었지."


  "아무것도 안 하고?"


  "딱히 뭐가 있는 집도 아니니까."




  길의 어조는 별다른 감정 없이 평탄했다. 카르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선 손을 맞잡은 채로, 두 사람은 어두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거리.


  도로의 양 옆으로 자동차들이 아무렇게나 주차된, 인도가 따로 없는 일방통행의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에 비하면 많이 늦은 시각인 탓에 늘 보던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셔터가 내려진 세탁소와 작은 슈퍼, 오래된 피아노 학원 같은 것. 불이 꺼지고 닫힌 것들의 앞을 지나간다. 거친 도로를 걸으며 새로 신은 구두가 불안해 카르나는 조금 비틀거렸고, 길이 그걸 잡아주었다. 


  그렇게 걷던 중, 문득 생각났다는 듯 카르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까지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할 일이 없었을 뿐이다. 너도 늦고."


  "역시 기다리게 한 건가?"


  "아침에 네가 나간 뒤로 기다렸다는 의미에선."




  그렇게 말하면 오래 기다렸지, 라고 말하는 길의 어조는 장난스럽다. 카르나는 웃었다. 


  낡은 연립주택과 낮은 빌라들이 가득한 주택가의 골목은 조용하다. 이따금 어느 집에선가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담이 낮은 주택 앞을 지나갈 때면 집 안에서 텔레비전의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온다. 생활의 기척이 있는데도 어쩐지 이것저것이 멀게만 느껴진다. 밤이고, 거리에는 두 사람뿐이어서일까. 카르나는 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잘못하면 이대로 영영, 세상으로부터 밀려나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우주를 떠 가는 사람처럼. 


  ……물론 그런 건 착각에 지나지 않겠지만서도.


  주황색의 불빛이 동그랗게 떨어지는 아스팔트 위를 가로지르며 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늦은 거냐?"


  "평소와 세 시간밖에 차이 안 나는데."


  "세 시간 늦은 것도 늦은 거고, 이 시간이었으면 버스도 막차였을 게 뻔하니 하는 말이다."




  눈을 흘기는 그를 향해, 카르나는 살짝 웃었다. 




  "……길, 처음엔 버스가 뭔지도 모르더니 이젠 막차라는 말도 쓸 수 있게 됐군."


  "사람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지 마라. 그래서?"


  "하긴, 그것도 그런가. 너는 빨리 배우는군."


  "카르나, 내가 물어본 것엔 아직 답하지 않았다만?"




  대답을 피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의 걸음에 맞추어 걸어가며, 카르나는 입을 열었다. 




  "……일이 좀 늦게 끝났을 뿐이다."


  "이 정도로 일이 많았다고?"


  "아니, 그건 아니다."


  "그게 아니면, 뭐냐.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늦게 올 이유가 있었다고?"


  "응."


  "단답으로 대답하지 말고, 설명을 해라."


  "그러니까, 일이 많았던 게 아니라."


  "그럼."

 

  "내가 실수를 해서……."




  순식간에 목소리가 침잠한다. 카르나 자신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그를 속일 수도 없다. 




  "실수라."


  "……응."




  절로 고개가 무거워져 카르나는 그렇게만 대답하곤 발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걷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실수를 했길래."


  "너는 잘 모를 테니까."


  "그럼 얼만큼의 실수였는지 정돈 말할 수 있지 않느냐."


  "그것도 잘 모를 테고."


  "……대체."




  길이 발을 멈췄다. 그와 손을 잡고 있었으니, 카르나도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손을 놓은 길이 카르나의 앞으로 돌아와 섰다. 


  생각한다. 가로등의 불빛을 등진 그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잠시 그의 손을 놓았을 뿐인 순간조차 아쉽게 느껴져, 카르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길이 말했다. 




  "그정돈 말해라."


  "……."


  "여태까지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말하지 않으면 계속 모를 수밖에 없지만, 네가 말해 주기만 한다면 내가 이 이후에 그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답답하다고 중얼거린 길이,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곤 비딱하게 섰다.  




  "그래도 말하지 않을 테냐?"


  "……."


  "카르나."


  "……."


  "널 힘들게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여태껏 혼자서 버텨왔던 카르나에겐 그런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재주가 별로 없다. 그나마 그와 함께 살면서부터 표현이 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형태의 것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서투르다. 오랫동안 속으로 삭혀 왔으니까. 


  길이 없었던 때는…….


 


  "……그냥."




  물어보는 사람, 한 명도 없었고.




  "카르나."




  더 이상 설명할 방도가 없어, 카르나는 손을 뻗어 길의 팔을 잡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사람이 사람에게 자신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은 하나같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 반을 내딛어, 카르나는 그의 가슴에 겨우 머리를 기댔다. 


  말로 한다 한들 어차피, 다 전해질 리 없어.




  "그냥 그런 게, 있다."


  "……."


  "별일 아니다."




  카르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별일 아니다. 스스로에게 되뇌듯이.




  "정말로 별일은, 아니니까……."




  카르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머리 위에서 길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포기할 거냐."




  아.




  "카르나, 정말로?"




  그 말이 뭐라고.


  콧속이 시큰해진다. 이마며 귀로 열이 오른다. 그러면서 울음이 울컥,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왔다. 




  "카르나?"




  애써 생각한다. 별일 아니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그냥 업무 지시 전달 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게 있었고, 그것 때문에 카르나가 실수를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론 카르나가 실수를 했으니 책임지고 수습해야 했을 뿐이다. 원인이 처음 전달 과정에서 실수한 사람에게 있든, 그걸 확인하지 않은 카르나의 담당 선배에게 있든, 결국 그 일 자체는 카르나가 한 것이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잘못한 걸 책임지는 건 당연한 거다. 속상할 것도, 서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역시 정말로 아프다고 느끼는 것은.


  네 앞의 내가 이렇게나 볼품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 주는 네게, 오늘 일을 다 설명할 자신이 없어 포기해 버린다. 결국 다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다 전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렇게.


  카르나는 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채 소리죽여 울었다. 




  "……네가 이럴 정도면 별일 아닐 리 없는데."




  등 위로 팔이 둘러졌다. 길의 팔이다. 


  마치 위로하는 듯한 온기에, 카르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한번 터져버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뚝뚝 흘러 떨어진다. 길의 옷을 붙잡고 있는 손등 위로, 잡고 있는 그의 옷 위로. 어깨에서 미끄러진 가방이 팔에 걸려 그대로 가방을 놓치고 싶어지는 것을, 길이 다른 손으로 걷어내 받아들었다. 




  "정말 아니라면 대체 왜 우는 거냐."


  "……."


  "별일이 아니라고 할 거라면 울지도 말아야지."


  "……."


  "……걱정하게 되지 않느냐."




  책망하는 말투로도, 등을 안아주는 손은 다정했다. 




  "그래도 네가 별일 아니라면……, 그걸로 됐다."




  그의 말에, 카르나는 결국 목놓아 울어버렸다. 그를 있는 힘껏 붙잡은 채로.


  ……네 앞에서 나는 몇 살일까. 


  어른인 척을 하기 위해 얼마의 나이를 가장하는 건지. 진짜 어른도 아니면서.








  여전히 거리는 어둡다. 


  그 어두운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건 꼭 우주를 헤엄쳐 나아가는 것 같다. 한 차례 주택가를 지나 낮고 오래된 상점가 쪽으로 접어들면서 멀어진 빌라의 불빛들이, 마치 별이 보내는 빛의 신호처럼 보인다. 


  길의 등에 업힌 채로, 카르나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가."




  길이 뚱한 어조로 대꾸했다. 카르나는 그의 목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여러 가지."


  "나참."


  "……."


  "말을 못하는 것도 어지간히 해야지."


  "그것도 포함해서, 미안하다……."




  그 말엔, 길도 웃어버렸다. 


  그렇게 길에게 업힌 채로, 또는 카르나를 업은 채로 가로등 아래를 지나간다. 동그랗게 빛이 떨어지는 자리. 마치 달처럼 보인다. 


  다음 달은 한참 앞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몇 개의 달을 지나왔고, 또 몇 개의 달을 앞에 두고 있는지.




  "카르나."


  "응."


  "회사 따위 그만두는 게 어떠냐?"


  "갑자기 무슨 소린가."




  카르나를 고쳐 업으며, 길이 대꾸했다. 




  "그럼 집세는 누가 내고."


  "까짓거 내가 내지."


  "식비는."


  "그것도 내가."


  "그렇지만 길은 직장도 없지 않나."


  "맘만 먹으면 만들 수 있지."




  카르나는 작게 웃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나쁘진 않겠다."


  "그렇지 않느냐?"


  "응."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누워 있는 거다."


  "……응."


  "그런 다음 느지막히 일어나선, 어슬렁어슬렁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아, 수프에 크루통을 잔뜩 넣어 먹어보고 싶다."


  "크루통이 아니라 바게트를 통째로 하나 먹게 해 주마."


  "그렇게까진 필요없지만. ……또?"


  "맛있는 걸로 점심을 먹은 다음엔, 둘이서 어디든 가는 거다. 네가 예전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정원이나, 전시회나……."




  또 하나의 달 위를 지나가고 있다. 




  "저녁엔, 야경이 보이는 레스토랑."


  "예전에 드라마에서 본 적 있다, 그런 곳."


  "네가 이름도 다 못 외울 만큼의 요리를 잔뜩 먹고. 그리곤 집에 돌아와서, 같이 씻고, 침대에 가서 다시 자고……."




  감은 눈꺼풀 아래로도 빛이 스며들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길."


  "음."


  "……나 힘낼 테니까."


 


  길이 발을 멈췄다. 


  카르나는 반만큼 눈을 떴다. 두 사람이 멈춘 곳은 달과 달 사이다.


  그대로 발을 멈춘 채 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르나가 말했다. 




  "그러니까, 언젠가 함께해 줬으면 좋겠다."


  "……."


  "네가 방금 전 들려준 이야기, 생각하면서 힘낼 테니까……."


  "……바보 같은 소릴."


  "응, 나는 바보가 맞다."




  뭐라고, 라고 말하면서 길이 업고 있는 카르나의 몸을 장난스레 흔들었다. 그의 목에 매달린 채로 카르나가 말했다. 




  "내가 바보라서 좋다고 하지 않았나?"


  "언젯적 얘기냐, 대체."


  "음, 그것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군."


  "벌써?"


  "응."


  "시간이 빠른걸."




  길이 중얼거렸다. 


  카르나는 그의 뒷머리카락에 이마를 비비며 말했다. 




  "……고맙다."


  "뭐가."


  "여러 가지."


  "아까도 했던 말인 것 같은데, 착각이냐?"


  "앞의 말이 다르지 않나."


  "나참."


  "너야말로 아까도 나참이라고 말했다."


  "네가 자꾸 황당한 말이나 하고 있으니 하는 거다!"


  "길, 화를 내면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둘 중 누가 웃은 건지 모를 정도로. 




  "어디까지 날 웃길 셈이냐?"


  "가능하다면 계속."


  "특이한 녀석."


  "네가 내 그런 점도 좋다고 했던 건 기억난다."


  "그만 좀 잊어라."




  그래도 그의 어조는 부드럽다. 카르나를 안아주었던 그의 팔이 다정했던 것처럼.




  "카르나."


  "응."


  "정말로 힘들면 말해야 한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카르나는 길의 어깨에 코끝을 묻은 채. 길은 카르나를 업고, 한 손에 카르나의 발에서 벗겨낸 구두를 모아쥔 채로.


  두 사람은 함께 몇 개의 달 위를 걸어서 지나가고 있었다.




  "꼭이다."

  "그렇지만 내가 일을 안 하면."

  "어떻게든 먹여 살릴 테니까."

  "길이?"

  "그래.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고."

  "……정말로 나 열심히 일해야겠군."

  "방금 전 내가 한 말은 대체 어디로 새어나간 게냐? 이쪽 귀냐?"



  카르나는 다시 길의 목에 매달리며 웃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까지는 아직 조금 더 걸어야 한다. 지나갈 달이 많다.  

  

  ……그렇지만 역시 이대로 떠내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잠깐 생각한다. 


  네가 있다면야.








  ++

  설명이 부족한 글이라 죄송합니다... 

  수플레님께서 얘기해 주셨던 「너는 펫」 느낌으로 길가메쉬를 주운 카르나TS입니다 진짜 원래 얘기가 짱인데... 제가 이 장면을 너무 좋아해서 막... 욕심을 부려 장면을 받아왔습니다... 제가 느꼈던 뭔가가 전달되면 좋겠는데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