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위와 아래, 좌우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하늘이 그의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흐르지 않는 것들의 정적으로 채워진 세계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카르나에게는 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길가메쉬라 한들 입자화한 개념을 걷어내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사념을 걸러내는 체라도 있단 말인가? 영혼과 관련이 있는 것이니 지상보다는 명계의 보물을 찾아봐야 하는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멈췄다.
불경하게도 왕의 꿈에 스며든 그의 사념을 걷어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미 입자화한 것을, 원래의 형태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가루로 부서진 것을 다시 모은다 한들 그 복잡한 형태를 빚어낼 수는 없겠지. 걷어내고 난 뒤에 카르나는 사라질 게 분명하고, 그러면.
길가메쉬는 턱을 매만졌다.
그러면 또 재미없는 꿈이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아무도 없는 꿈. 키시나미 하쿠노를 만나기 전까지의 길가메쉬가 몇천 년을 꾸고 또 꾸었던 꿈.
그 재미없는 꿈을 생각한다면, 카르나 놈이 저지르는 약간의 불경 정도는 윤허할 수도 있지 않는가 생각했다. 못 할 것도 없지. 그 시간에 질려 키시나미 하쿠노와의 계약도 받아들였으니. 어쨌든 카르나 놈의 꿈에는 사람이 있다. 길가메쉬의 꿈에 아무도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왕은 눈을 감았다. 그 꿈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다시금 눈을 뜨면 그 침상 위였다.
아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길가메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낯선 향과 장식, 직물들. 맹렬하게 내리쪼이는 햇볕 속에서 먼지들이 하늘거리고 있다.
집 안은 조용했다.
길가메쉬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자리를 비운 건지. 바깥에는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오래 지나진 않은 것 같다. 햇볕이 조금 더 강해진 걸 봤을 때에는,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간 정도일까.
침상에서 내려온 길가메쉬는 다시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런 데에서까지 카르나 놈의 인식은 좁디좁은 것인지, 집 안은 얼마만 걸어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바깥으로 나가려 문가로 돌아왔을 때,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길가메쉬는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카르나가 들어왔다.
손에는 그릇을 들고 있었다. 바로 그 앞에 서 있던 길가메쉬와 눈이 마주친 카르나가 그대로 잠시, 멈췄다. 길가메쉬는 인상을 쓰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키 차이가 엄청났다.
"……아, 왔군."
카르나는 다른 손으로 문을 닫으며 그렇게 말했다.
"해결된 건가?"
"어딜 갔다 온 게냐?"
"먹을 것을 가져왔다."
그렇게 말하는 카르나에게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길가메쉬는 눈썹을 찡그리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앞의 카르나는 잠들기 전에 봤던 그 모습에서 변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뭔가 달라진 게 있다. 옷인가?
아니, 옷은 아니군. 여전히 너절한 넝마 쪼가리를 걸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느 쪽인 건가? 방법은 찾았나."
"잠깐, 네놈, 아까 전과 어딘가 달라지지 않았나."
일의 진행을 묻는 카르나의 말을 멈추고, 길가메쉬는 일단 그것부터 따져물었다. 카르나는 길가메쉬의 질문에 눈을 깜박이다 말했다.
"아까 전과?"
"그래."
길가메쉬는 자신의 턱에 손을 댔다.
뭔가 미묘하게 달라진 건 확실하다. 옷은 아니니, 얼굴이나 머리인가. 눈의 색, 눈썹 모양, 눈 아래의 붉은 화장, 그런 것들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머리 모양인가."
"별 차이 없다만."
"그렇다면 머리 길이로군."
길가메쉬가 카르나의 귀 아래를 가리켰다. 카르나는 그릇을 들지 않은 다른쪽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래, 확실히 머리카락이 길어졌다.
"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는 영웅왕의 혜안.
길가메쉬가 턱을 치켜올리고 그렇게 말하자, 카르나는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일 년이나 지났으니까."
"……하?"
"그보다 배는 고프지 않나? 입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잠깐, 뭐라고 했느냐? 일 년?"
"음, 네가 잠들고 일 년이 지나서 나는 열네 살이 됐다."
눈앞의 그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쓸데없을 만큼 진실을 말해 해를 입었으면 입었지 반대를 저지르는 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그나마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길가메쉬는 카르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더 길어진 머리카락과 볼의 젖살이 빠져 갸름해진 것이 눈에 띈다. 전반적으로 선이 더 가늘어졌다. 그 비쩍 마른 몸에서 더 빠질 게 있다니 그것도 놀라웠지만.
"……내가 잠들고 일 년이 지났다고?"
"응."
"그동안 그럼 네놈은 뭘 했느냐?"
이상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카르나가 대답했다.
"평소와 같이 살았다."
"……일 년을?"
"분명한 것을 묻는 이유를 모르겠군."
"확인하려는 거다. 일 년을, 여기에서."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라도 있나?"
"질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영웅왕, 방법은 찾았나."
"아니."
"……."
카르나의 눈빛이,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갔으면서……, 하는 종류의 것이 되었지만, 길가메쉬는 어쩔 테냐 하는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눈을 마주보던 카르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군. ……그래, 알겠다."
"……."
"어차피 나는 여기에서 나갈 수 없으니, 그건 네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기다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