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AG #중 / 현대 레이서 AU
다음날 길가메쉬는 호텔 앞에 차 한 대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자신이 타던 차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 공수 가능한 차량 중 적당히 길가메쉬의 취향과 시간에 맞출 수 있는 것으로 타협했다.
카르나는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나왔다.
"왔군."
"기다린 건가?"
"그렇다면 어쩔 거냐. ……군소리는 됐으니, 타라."
길가메쉬가 세워져 있는 차량을 가리키자,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
매끈한 차체는 황금빛에 가까운 선명한 노란색이었고 차체 내부의 시트는 붉은색으로 맞춰져 있다. 카르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길가메쉬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키를 건네주자 카르나는 길가메쉬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갈 건가?"
"드라이브나 하지."
"……이쪽은 잘 모르지만, 네가 그걸로 괜찮다면."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자, 파워풀한 엔진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카르나는 스티어링 휠에 손을 뻗어 잡았다. 그동안 길가메쉬는 그 옆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휠을 잡은 남자의 얼굴은 진지하다. 앞을 곧게 바라보고 있는 눈, 운전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꽉 다물린 입술. 매끈한 턱선과 목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감상하며 길가메쉬는 그의 가슴과, 팔, 휠을 잡고 있는 손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갑자기 시동이 꺼졌다.
카르나가 옆을 돌아보았다.
"……."
가운데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길가메쉬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마주보았다. 곧 자신의 벨트를 푼 카르나가, 길가메쉬 쪽으로 슥 몸을 가까이 했다.
"-무슨."
그리고 길가메쉬의 어깨를 끌어안듯이 손을 올린 그가, 그의 시트 대각선 위에 있는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채웠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몸을 원래의 자리로 물린 카르나가 길가메쉬를 돌아보며 말했다.
"차에 타면 안전벨트를 꼭 해라."
"……."
"내가 포뮬러 원 레이서라고는 하나, 만약의 경우 네 목숨까지 지켜줄 수는 없다."
길가메쉬는 대답 대신 혀를 찼다.
서킷 위에서 보이는 공격적인 레이싱과 달리, 일반 도로 위의 그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포뮬러 원 레이서들 중 과속 딱지를 떼는 사람들이 은근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일면이기도 했다. 몰고 있는 차만 보면 한적한 교외의 도로가 아니라 아우토반을 달려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카르나는 젠틀한 운전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건 의외성이라는 점에서, 길가메쉬의 맘에 들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시외의 도로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두 사람은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조수석에서 내리며 길가메쉬가 그 이야기를 하자, 길가메쉬의 옆으로 돌아온 카르나가 대꾸했다.
"서킷 위에서의 운전은 경기다."
"……그러니 일반 도로와는 다르다?"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라이브라고 했으니까."
흠, 하고 길가메쉬는 목을 울렸다. 뭐, 맞는 말이다. 길가메쉬는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안했지 레이싱을 하라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
바지 주머니에 손을 구겨넣은 카르나가 길가메쉬를 돌아보았다.
"이제 된 건가?"
"아직."
길가메쉬의 대답에 카르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카르나가 어제 말했던 오후 6시까지는 7시간이 남은 셈이다. 길가메쉬는 그의 핸드폰을 보았다가, 카르나의 손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굳이 멋없이 핸드폰을 보나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시계도 없는 게냐."
"음? 아."
"지난번 모델로 섰을 때 시착품을 받았을 텐데?"
"거추장스러워서."
그리고 카르나는 덧붙여 말했다.
"아무래도 쓸 일이 없을 것 같기에, 기부했다."
"뭐?"
카르나는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길가메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길가메쉬로서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수밖에 없었다. 십여 년 전 길가메쉬가 인수한 그 시계 회사는 오래된 명품으로 이름 높은 브랜드다. 그 브랜드의 신작을 받고서도 쓸 일이 없어 기부했다니.
"어차피 쓰지 않을 물건이라면, 나보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게 좋지 않나?"
"네놈……."
노려보는 시선에도 카르나는 담담했다.
"12시가 되면 도시락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됐다! 따라와라."
그리고 길가메쉬는 카르나의 빈 손목을 휙 나꿔챘다. 잡아당기자, 카르나는 버티고 서는 것도 없이 곧장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따라왔다. 길가메쉬는 그대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향한 곳은 길가메쉬가 머물고 있는 펜트하우스 층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길가메쉬는 곧바로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가 프런트를 호출했다. 곧 데스크로 연결되어,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펜트하우스 담당 컨시어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가메쉬는 용건을 말했다.
"손목시계를 살 거다."
「그러면, 원하시는 브랜드가 있으실까요?」
"귀찮게 묻지 마라. 내가 누구인지 알 텐데? 11시 30분까지 사람을 보내도록."
그렇게 쏘아붙이고 길가메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뒤에서는 카르나가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필요없는 것을 사는 건 낭비가 아닌가."
"내가 주는 것이다. 필요있게 만들어라."
"……선물이라면, 더더욱 받기 어렵다. 나보다 그것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잔말 마라. 나는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한다."
카르나는 모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본 길가메쉬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 올 때까지 20분 남았군. 따라와라."
"어딜 말인가?"
"드레스 룸."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카르나를 돌아보고 길가메쉬는 말했다.
"또 내가 끌고 가야 하느냐?"
"……아니, 가겠다."
드레스 룸에 들어온 길가메쉬는, 그를 따라 들어온 카르나에게 셔츠와 자켓을 던져주었다.
"옷은 왜."
"이 내가, 모델로 너를 기용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니냐?"
"……시계 모델이 아니었나?"
"시계라고 해서 손목만 나오는 건 아니지."
그 말에 카르나는 조금 납득한 것 같았다. 그걸로 갈아입으라고 하자, 카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에서 말인가?"
"……그것도 좋지."
의미심장한 길가메쉬의 표정과 말이었지만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개를 끄덕인 카르나는 입고 있던 흰색 셔츠의 단추에 곧장 손을 얹었다. 딱히 길가메쉬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길가메쉬는 바라보고 있었다. 옷을 벗는 카르나를.
레이서답다고 해야 할지, 혹은 레이서라는 이름의 스포츠 선수보다는 의상 모델에 어울릴 몸매라고 해야 할지 모호한 몸매다. 마른 몸이지만 근육은 바짝 잡혀 있다. 셔츠에서 팔을 빼내며 드러나는 근육들. 각각 짜임새 있게 꽉 맞추어져 있어 그 밀도가 높다. 하얀 피부에 생겨나는 음영을 바라보며 길가메쉬는 살짝 입매를 꿈틀거렸다.
흰색 셔츠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길가메쉬가 건넨 검은색의 셔츠를 걸치며, 카르나는 다시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단추를 채워나갔다. 피부가 흰 탓에 검은색이 잘 받는다. 붉은색도 잘 받겠지. 무엇이든 바탕이 희면 대비 효과가 좋다. 가장 위의 단추는 푼 채로 놓아두고 카르나가 자켓을 걸쳤다.
"……화려하군."
호피 무늬가 들어간 자켓에 대한, 카르나의 감상이었다.
길가메쉬는 카르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끌어안을 수도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선 그는 손을 들어 카르나가 입고 있는 셔츠의 칼라를 정리해 주었다. 길가메쉬보다 몇 센티미터 작은 카르나와 길가메쉬의 눈높이는 애매하게 비껴 있어, 이 근접거리에서는 카르나가 길가메쉬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뒤 길가메쉬는 카르나의 이마에 손을 댔다.
"……."
이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길가메쉬는 별다른 대답 없이, 손가락을 그의 이마와 앞머리카락 사이로 밀어넣어 뻗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넘긴 머리카락은 길이가 있어선지 천천히 내려왔다.
"흠."
"……넘기는 게 나은가?"
"광고를 찍을 땐 넘기는 것도 괜찮겠군."
"음."
카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것이라 그런지 품은 좀 남는구나. ……뭐, 모양새는 나쁘지 않다. 테일러를 불러다 이대로 사이즈만 줄여도 되겠군."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네 옷이 아닌가?"
"그까짓 옷 한두 벌 있는 게 아니다."
길가메쉬는 그렇게 말하곤, 바지와 구두도 카르나의 앞에 던져주었다.
"그것도 갈아입어라."
카르나가 바지의 벨트에 손을 댔을 때였다. 인터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메쉬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시각은 아직 10분이 남아 있다. 30분에 오라고 했을 텐데, 하며 바깥으로 나간 길가메쉬는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여러 개의 인터폰 중 하나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30분에 오라고 했을 텐데. 시간 맞춰 다시."
"다 갈아입었다."
드레스 룸 바깥으로 나온 카르나가 자신을 가리켜보였다. 구두까지 갈아 신은 다음이었다.
길가메쉬는 두 번째의 한숨을 내쉰 뒤, 인터폰 너머를 향해 들어오라고 말했다.
멀찍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길, 결과는 어땠는데?」
"쯧."
「유능한 민완 사업가 길가메쉬가 사업에 실패했다거나?」
길가메쉬는 어둑해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약만 올릴 거라면 카지노는 내 거다."
「어, 그건 안 되지. 한번 사줬으면 끝난 거야.」
"아직 네게 계약서도 안 줬다만?"
「어라, 그것도 그렇네. ……뭐,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난 시계 선물의 의미를 모르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십여 분 동안의 통화 중, 그나마 가장 영양가 있을 말이 나왔다. 길가메쉬는 창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시가지의 불빛들을 내려다보았다.
"……시계의 뜻도 모른다면, 옷을 선물하는 의미도 모르는 거겠지."
「아, 음, 가능성 있네. 그래서, 업무를 핑계로 한 다음 데이트는?」
"화요일, 귀국해서."
음음, 하고, 핸드폰 너머의 엘키두는 살짝 신난 듯한 어조였다.
「돌아오면 어디서 만나는지 나한테도 얘기해 줄 거지?」
"쫓아오려는 건 아니겠지."
「그야 당연한 말을! 쫓아가야지.」
"……안 알려줄 거다."
「왜? 이렇게 난항을 겪고 있는 길의 연애사업만큼 재미있는 게 또 어디 있다고?」
"네가 그렇게 좋아할 게 틀림없으니까."
「아차, 말해버렸네.」
즐겁게, 깔깔 웃는다.
오랜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길가메쉬는 몸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몸을 묻은 그는 샹들리에가 매달린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길도 경기 끝나는 대로 올 거지? 그러면 월요일부터는 다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아마."
「와! 놀아야지!」
"그래."
「내일 예선 레이스는 보러 갈 거야?」
"그럴 거다."
길가메쉬는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자주 보는 게 중요하니까. ……초반엔 자주 얼굴을 비추고, 나중엔 좀 뜸하게 해서."
「아, 또 나쁜 남자. 그거 자꾸 하면 인기 없어질걸.」
"연애는 원래 밀고 당기는 게 없으면 재미없는 법이다."
「난 또. 이번에야말로 순정인가 했더니.」
"얼굴과 눈빛과 몸매가 취향이다."
「와-」
엘키두가 폭소했다.
「꽤 많이 취향이잖아? 역시.」
"뭐가 역시냐."
「아니 그냥 그렇다고. 알았어, 그럼 경기 끝나는 대로 와서, 월요일엔 정상 출근하는 걸로.」
"그래."
「내일 잘 다녀오고.」
그렇게 말한 뒤, 통화는 끊겼다. 길가메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시계를 선물하고, 점심은 카르나에게 먹을 것을 방으로 가져오게 해 같이 먹었다. 카르나는 준비된 도시락을, 길가메쉬는 룸 서비스였지만 어쨌든. 그러고 나서는 테일러를 불러 옷의 품과 기장을 조금씩 줄여 카르나에게 맞췄다. 그 다음은 내일 있을 예선에 관해 이야기를 했고, 예선 이야기와 함께 카르나는 포뮬러 원 레이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물론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카르나가 이야기하는 것이었기에 들어주었다. 그런 길가메쉬의 반응을 좋은 쪽으로 해석했는지, 카르나는 부족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총동원해 열심히 설명했고 그 모습은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그렇다 한들, 그런 식으로 사람에 꽂히는 일은, 그에게 있어 드문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이런 일은 꽤 있었다. 시계를 선물하는 것도, 옷을 선물하는 것도 다 해 본 일이다.
길가메쉬는 눈을 감았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꽂혀 있는 동안은 즐겨야 한다. 사람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은 금방이니까.
동시에 조금,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 남자는 지금도 그의 전부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길가메쉬는 카르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그렇게 잘할 위인으로 보이진 않는다. 사람을 속이고도 태연한 얼굴로 있을 수 있는 길가메쉬와도 양상이 다르다.
그렇다면 그게 진실일 수도 있지.
……정말로 그렇다면, 편할지도 모르는데.
++
왠지 하편... 보다 더 뒤로 뭐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네요 어쩌다 이렇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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