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g,










  길가메쉬의 변덕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대형 텔레비전 앞에 벌써 2시간째 앉아 있는 길가메쉬를, 엘키두는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채널을 몇백 번 바꾸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그는 완전히 집중한 표정으로 포뮬러 원 레이스의 스페인 그랑프리 중계 방송을 보고 있었다. 




  "재밌어?"


  "음."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건지 대답도 건성이다. 엘키두는 길가메쉬의 옆에 와 섰다. 


  거대한 패널에 비춰지는 서킷 위를, 경주용 차량들이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부딪칠 것 같은 위기에서도 레이서들은 빠르게 반응해 머신을 몰아간다. 화면의 왼쪽 위에는 1위부터 20위까지의 시트가 이니셜로 표기되어 있다. 




  "관심 가는 사람은?"


  "……."




  길가메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키두는 금방 그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미동도 않고 화면만 바라보기에 바쁘던 그가, 한 차량의 온보드 캠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앉았기 때문이다. 


  엘키두는 화면 아래에 뜨는 남자의 이름을 읽었다. 카르나. 


  이름이 낯익다. 엘키두는 그 이름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려 했다. 어디였더라? 아마 직접 만나거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고, 서류상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낯선 표기였고, 그 옆에 따로 이름을 읽는 방식이 영어로 쓰여 있어 읽어보기도 했던 것 같다. 




  "아."




  다행히, 금방 떠올랐다. 


  작년 말에 올해 신작 남성용 손목시계의 잡지 모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봤던 이름이다. 그때 여러 모델들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그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직업의 대부분이 프로 모델인 후보군에서 그 혼자만 레이서로 기재되어 있던 것까지 떠올리고, 엘키두는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구나, 지난번 시계 모델."


  "……그래."




  오늘 그가 텔레비전 앞에 앉은 후 처음으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하여간 이런 점은 얼마가 지나도 어린애 같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엘키두는 길가메쉬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어떤데?"


  "제법."




  그러나 여전히 길가메쉬의 대답은 건성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겠지. 엘키두는 레이스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겸, 그의 옆에 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보기로 했다. 








  10일 후.


  길가메쉬는 돌연 해외 출장을 다녀오겠다며, 회사의 운영을 전부 엘키두에게 일임하고는 떠나버렸다. 물론 원래부터 아랫사람을 믿고 일을 맡기는 길가메쉬인 만큼, 그의 자리를 대신 받는다고 해서 엘키두가 해야 할 일이 크게 생기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혼자 일하게 놔두고 자기는 유유자적하게 해외 출장이라니, 그 점만은 봐줄 수 없다. 그를 배웅하며 '올 때 몬테 카를로 카지노'라고 말하긴 했지만, 새삼 왜 그때 '올 때 바티칸 대성당'이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살짝 후회됐다. 


  대강 하루치 업무를 마무리한 뒤, 엘키두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채널은 포뮬러 원 레이스 중계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주말에 하겠구나."




  이번 경기.


  얼마 전 길가메쉬와 보았던 스페인 그랑프리를 떠올리고, 엘키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2주 간격으로 경기가 있다는 모양이니까. 지난주에는 안 했고. 


  어라, 그러고 보니.




  "……모나코네?"




  화면의 한 귀퉁이에 떠 있는 MONACO Grand Prix라는 글자를 보고, 엘키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나코잖아?"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 했다. 


  길가메쉬가 간다던 곳이.




  "……모나코였는데."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키두는 망설임 없이 책상 앞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2번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국제전화로 연결된다는 안내음이 나온 뒤 곧바로 신호가 이어졌다. 


  핸드폰 너머에서 길가메쉬가 말했다. 




  「몬테 카를로 카지노는 사뒀다.」


  "그거 말고."




  엘키두는 딱 잘라 대답했다. 




  「……다른 거 사오라고 하지 마라. 들를 시간 없으니까.」


  "길, 솔직하게 말해."


  「갑자기 전화해서는 무슨 말이냐.」




  길가메쉬의 어조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따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설마 그랑프리 보러 간 거야?"


  「아니.」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그럼?"


  「연애 사업. 끊으마.」




  그리고 예상했던 대답보다 어마어마한 폭탄을 던지고, 길가메쉬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든 채로 엘키두는 말없이 서 있다가, 한참 지나 책상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인물이 딱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 사람밖에 없는 것 같다. 


  엘키두는 핸드폰을 다시 집어들어 길가메쉬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뭐냐.」


  "연애 사업이라며?"


  「그래. 알면 그만 방해해라.」


  "그럼 지난번에, 내가 관심 가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 대답 안 했던 건, 그냥 관심이 아니라서였구나?"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냐?」


  "그것도 말 안 하고 끊을 생각인 건 아니겠지."


  「맞다.」


  "어느 쪽 말에 맞다고 하는 건데? 그냥 관심이 아니었는 게 맞다는 거야, 아니면 그것도 말 안 하고 끊을 생각이라는 거야?"


  「……전자다. 이제 됐지.」




  정말 끊는다, 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전화가 끊겼다. 


  엘키두는 핸드폰을 들고 선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봤어야 하는데.








  "날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카페의 자리로 다시 돌아와 앉는 길가메쉬를 보며, 카르나는 그렇게 말했다. 




  "별일 아니다. 그보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내일 금요일에 일정이 있는지."


  "아, 그래. 그래서, 일정은?"


  "없다."




  살짝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분다. 길가메쉬의 지시로 호텔 측에서 따로 준비한 라운지 카페의 테라스석 테이블 위, 주홍빛 볕이 비스듬하게 들고 있었다. 


  카르나의 머리카락과 얼굴, 어깨 위로 지나는 빛을 보며 길가메쉬는 차분히 말했다. 




  "예선은? 토요일인가."


  "응. ……잘 알고 있군."


  "조사를 했으니까. 그럼 내일은 별다른 공식 일정이 없단 얘기지."


  "맞다."


  "그날 시간을 좀 내라."




  길가메쉬의 말에, 카르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서킷 위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레이서지만 이럴 때의 행동은 앳되다는 평이 많다. 어려워하는 것으로 복잡하고 험난한 트랙 이름이나 경기에 수반되는 난관들 대신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는 그답다.




  "……광고에 관련된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나?"


  "사적인 얘기다."




  길가메쉬는 단언했다. 


  카르나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 대답했다. 




  "그것도 가능하긴 하다. 늦게까지는 어렵겠지만."


  "늦게까지?"


  "저녁 6시 정도."




  카르나의 입에서 나온 저녁 6시라는 말에, 길가메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시각을 늦다 말하는 것이 우습다.


  물론 카르나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아니, ……어지간히도 귀여운 시간이로군,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귀엽지 않느냐. 저녁 6시라. 요즘은 어린애들도 저녁 6시를 늦다 말하는 일이 드물 텐데."


  "다음날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중요하다.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으면, 예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어렵고."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뻔하다. 예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좋은 그리드를 받을 수 없다. 뒤쪽의 그리드로 밀려나면 당연히 본경기인 일요일에도 선두로 나서기 어려워진다. 뭐,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의 이야기인 거겠지. 


  카르나는 길가메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정도면 되겠나? 더 늦게까지 시간이 필요하면, 그랑프리가 끝난 다음주로 약속을 다시 잡는 게."


  "됐다, 맞춰보지."




  길가메쉬가 그렇게 말해 카르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작년에는 다른 사람과 일을 진행했던 것 같다만."


  "그래서?"


  "그 사람이 안 온 것이 좀 의아해서."


  "회사도 늘 똑같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길가메쉬는 자신 앞의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뭐, 그때 일하던 사람이 여전히 담당 업무를 맡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이 해야만 반드시 직성이 풀리는 종류의 인간이다. 광고 이야기로 미팅 건을 잡기는 했으나 진짜 용건은 카르나의 금요일 일정을 따내는 데에 있었다. 


  카르나는 그런 길가메쉬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가, 자신 앞에 놓인 똑같은 모양새의 찻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대로 느릿느릿, 침묵이 흐른다. 




  "금요일에는……."




  카르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길가메쉬는 카르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혼잣말이었다만……."


  "혼잣말이 제법 컸다."


  "……금요일에, 뭔가 하는 건가?"




  이번에는 길가메쉬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당장 내일의 일이고."


  "그것도, 그렇군……."


  "궁금해 하는 것이냐? 카르나."


  "……."




  테이블 너머로, 맑은 시선이 흔들리다 멈췄다. 누가 봐도 알기 쉬운 신호였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카르나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나가 입을 열었다. 




  "신경쓰인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작년 광고주가 시즌에 갑작스레 찾아와 새 광고의 계약 검토와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요청했는데, 무슨 일인지 그 일정은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이."




  물어본 대로 구체적인 답변이 돌아와 길가메쉬는 미소지었다. 이런 데에서까지도 카르나의 행동 하나하나는 정석적이다.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이렇게 대답한다, 같은 것이 머릿속에 있는 사람 같다. 


  프레스 컨퍼런스나 오피셜적인 어떤 자리에서든 늘 이런 식인 남자가, 서킷 위에 올라가면 달라진다. 길가메쉬가 흥미를 가졌던 부분도 그 점이었다.




  "전부는 알려줄 수 없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말하지 않."


  "한 가지만 말하자면, 네가 운전하는 차에 타보고 싶다는 것."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카르나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내가 운전하는, 차 말인가."


  "그래. 뭐,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네게도 전속 운전수가 있지 않나?"


  "그것과는 별개로, 너라는 드라이버가 흥미로워서다."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이 조금 내려갔다. 


  아니나다를까, 카르나는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가……, 그렇군."


  "그래. 금요일날의 일정이 전부 그걸 위한 건 아니지만, 일부는 그게 맞다. 영광으로 생각하는 게 어떠냐?"


  "음."




  찻잔을 내려놓고, 카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어렵진 않은 일이군. 이야기해 주어 고맙다.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길가메쉬는 이제 완연히 주홍빛으로 물든 그의 앞머리카락과, 속눈썹 끝을 바라보았다. 마음의 준비라. 대체 뭘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벌써부터 안심해서는 안 될 텐데. 




  "그럼 내일."


  "하?"




  그리고 카르나는 산뜻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만날 것 아닌가?"


  "아니, 잠깐, 앉아라."


  "?"




  길가메쉬의 말에, 카르나가 일단 앉으라면 앉겠다,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지금 가겠다는 거냐?"


  "그렇다만……."




  무슨 문제라도, 하고 카르나가 눈썹을 모았다. 




  "무드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놈."


  "……무드가 있었던 건가?"


  "……."




  길가메쉬가 카르나를 노려보았지만, 카르나의 표정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종류의 것이었다. 길가메쉬는 질렸다는 눈빛을 보냈다. 카르나의 가드는 그보다 강력해서 전부 다 튕겨내고 말았지만. 




  "생각해 봐라, 카르나. 이 바쁜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널 불러내 단둘이 앉아 있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무드가 되겠지."


  "그런가."


  "그런데 네놈은 지금 여기에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가겠다는 것 아니냐?"


  "부정하진 않겠다. 네 말이 맞다."


  "그게 바로 무드 없는 행동이다."


  "……."




  잠시 생각하던 카르나가, 그것도 그렇군, 하고 대답했다. 




  "미안하다, 길가메쉬. 내가 무드 없었군."


  "알았다면 됐다."


  "그럼 이제 여기 언제까지 앉아 있으면 되는 건가?"


  "……그런 것도 무드 없는 짓이다."




  길가메쉬는 그렇게 쏘아붙이곤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도록 얘기해 뒀다. 먹고 가라."




  그 말에 카르나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식단 관리 중이다."


  "……."


  "팀 크루가 준비해 준 고단백 위주의……. 혹시 이것도 무드 없는 얘기였다면, 미안하다."




  길가메쉬가 혀를 찼다. 무드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그렇다, 경기를 앞두고 있으니 식단 관리를 할 거라는 걸 미처 예상 못 했다. 그 부분은 길가메쉬의 미스였다. 




  "그러면, 차 말고 술은."


  "그랑프리 주간엔 술도 마시지 않는다. 네가 마신다면 앞에 앉아 있을 수는 있지만."


  "……까다롭군."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니까."




  담담한 어조로 그가 대꾸했다. 길가메쉬는 눈썹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럼 됐다. 얘기나 좀 더 하지."


  "무슨 얘기를."


  "아무거나 좋다."




  카르나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토요일의 목표를……."


  "그건 필요없다."


  "1등을 해서, 폴 포지션을 따내는 것이……."


  "그건 필요없다고 했다."


  "……그럼 예전 이야기가 좋은 건가?"




  예전 이야기라. 


  길가메쉬는 어디 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지난 며칠과 모나코로 오는 비행기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읽어봤기에 대강은 알고 있었으나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또 다르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좋다, 어디 한번 그 예전 이야기를 해 봐라."




  ……고개를 끄덕인 카르나가 카트를 몰던 자신의 십대 때부터 이야기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대서사시가 시작됐다.










  ++

  중편이 나오거나... 하편이 나오거나 합니다... 

  엘키두의 1번은 샴하트입니다(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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