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서스 au(현대 학원물) / 제12회 디페스타에 책으로 나옵니다.
여태까지 살면서 꽃집 일이 자신의 천성과 맞는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세들어 사는 집에 어떻게 갚을 길이 없어 손이라도 보태려 시작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당장 오늘처럼, 꽃을 사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밝으면 아무래도 기분이 좋았다. 잘하는 일이 아니니까 힘들긴 해도, 이 일은 보람이 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생각하며 카르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안고 가는 손님의 등을 배웅했다. 그리고 그 손님의 뒷모습이 아주 작아져서 안 보이게 될 즈음에야, 카르나는 몸을 돌려 꽃집 안으로 들어왔다.
문의 끄트머리에 달린 방울이 맑은 소리를 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식물의 냄새가 콧속으로 훅 끼쳐왔다. 촉촉하게 젖은 공기, 파릇한 풀잎, 여러 꽃이 뿜어내는 향기들이 섞여 마치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일은 서툴러도 이 분위기가 좋다. 카르나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고는, 몸을 돌려 작업용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길이가 안 맞아 잘랐던 리본 조각, 줄기에서 쳐낸 잎 등이 흩어져 있었다. 손님의 주문대로 꽃다발 모양을 다듬기 위해 자른 꽃가지도 작게 떨어져 있었다. 서랍에 넣어뒀던 책상용 빗자루를 꺼내서, 카르나는 그 위를 쓸었다. 얼마 안 가 쓰레받기가 꽉 찼다. 별 것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공간을 제법 차지해서,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바로바로 치워야 했다. 카르나는 산뜻한 손놀림으로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리본을 말고, 포장지를 접어 보관함에 넣었다.
그렇게 카르나가 한창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을 때, 카운터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카르나,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
카운터에서 몸을 내민 마스터가 시계를 가리켰다. 카르나는 돌돌 만 포장지를 든 채로, 손을 멈췄다.
“……아.”
생각났다.
카르나의 시선이 튕기듯 벽면의 시계로 향했다. 오후 1시 30분, 정확하게는 32분이었다.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카르나는 순간적으로 고민에 빠졌다.
지금부터 준비를 한다고 하면, 일단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그 전에 이걸 치워야 하나. 어디에 정리해서 올려두기엔…….
바쁘게 생각하고 있는 카르나의 등을 떠밀듯, 바깥의 도로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나는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손에 포장지가 들려 있다는 것을 의식조차 못한 표정으로 그걸 든 채 밖에 나갔다.
도로에는 말끔하게 닦인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집 앞으로 나온 카르나를 봤는지 짙게 썬팅된 창문이 내려갔다. 열린 창으로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안경을 낀 아르주나였다.
“빨리 타라. ……아니, 아직 준비도 안 됐.”
카르나의 손에 들린 포장지를 보고, 아르주나는 할 말을 잃었다. 카르나도 그제서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미안하다.”
“…….”
아르주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카르나는 곤혹스레 서 있었다.
길다면 길 시간이 지나, 아르주나가 쏘아붙였다.
“……그래서, 지금 거기 서서 뭐 하는 거냐.”
“아.”
“계속 서 있기만 할 건가?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빨리 옷 갈아입고 가방이나 챙겨나와라. ……가뜩이나 오늘 갈 곳도 많아 바쁜데.”
카르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그는 포장지를 든 채로 금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르주나는 카르나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창문이 올라가 그의 옆얼굴을 가렸다.
카르나는 포장지를 작업용 책상 위에 던져놓고 2층의 방까지 다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돌아보면 보이는 벽에 교복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래, 오늘 약속을 잊은 것도 아니었고, 준비는 미리 해두고 있었다. 다만 일을 하다 보니 완전히 깜박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걸치고 있던 앞치마는 오늘따라 매듭을 빠듯하게 묶었는지, 푸는 것도 빡빡했다. 카르나는 성급한 손길로 막 앞치마를 벗고 옷걸이에서 교복을 잡아당겨 끌어내렸다.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으며,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자켓까지 걸치고 앞쪽의 단추를 잠근 뒤, 벽에 기대 두었던 브리프케이스를 나꿔챘다. 마지막으로 신발장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자그마한 두 칸짜리 장에서 구두를 꺼내 갈아신었다.
카르나는 날듯이 계단을 뛰어내려와 곧장 꽃집 밖으로 나갔다. 세단은 여전히 그 앞 도로에 정차해 있었다. 인도 쪽으로 아르주나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카르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도로 쪽으로 걸어나가 차에 탔다.
카르나가 타고 차 문이 닫히자, 팔짱을 끼고 앉은 채로 아르주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켜니 액정의 시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정보다 10분 정도 늦었다. 그 아래로는 15분 전 아르주나로부터 온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곧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정했던 시각보다 늦어진 것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아르주나가 운전석의 기사에게 턱짓을 했다. 그 신호에 두 사람을 태운 세단은 부드럽게 출발해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초조한 분위기를 함축해 표현하듯, 차내에는 음악도 한 편 흐르지 않았다. 나지막한 엔진의 구동음만이 가라앉아 조용했다. 카르나는 창밖의 풍경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주었다. 조용한 엔진 소리에 비해 바깥의 풍경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익숙했던 거리가 순식간에 바뀌어 다른 곳이 되었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옆에서 들려온 아르주나의 목소리에 카르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어제 이미 끝내놨다.”
“……아르바이트나 하다가 뛰쳐나와서야, 제대로 읽기나 하겠어.”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다.”
아르주나는 카르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짜증스레 혀를 차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또 그따위로 말하는군.”
“…….”
“됐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내가 혹시 실수했나?”
아르주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르나는 그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대로 침묵이 이어졌다.
차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달려, 시 외곽의 중학교 교문 앞에서 멈춰 섰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먼저 내려 아르주나가 앉아 있는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오는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아르주나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차에서 내렸다. 그동안 카르나는 자신이 앉은 쪽의 문을 열고 내렸다.
“주차장 쪽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네.”
아르주나는 짧게 답하며 미소지었다. 카르나에게는 지은 적 없는 표정이었다. 차의 뒤편으로 돌아온 카르나는 아르주나를 한번 곁눈질하곤, 뒤를 돌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카르나의 옆으로 온 그는 평소와 같은 서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카르나도 걸음을 빨리해 그의 옆으로 갔다. 가까워진 탓인지 희미하게 진동음 같은 것이 들렸다.
“……아르주나, 전화가 온 것 같다만.”
그렇게 말을 건네자, 아르주나는 발을 멈췄다. 그리고 카르나와 마찬가지로 들고 있던 브리프케이스의 앞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예, 아르주나입니다.”
카르나도 그의 옆에 이른 시점에서 발을 멈췄다.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같이 온 이상은, 일행이다. 카르나는 멈춰서서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예, 그러면 일단 지금 늦었으니, 말씀하신 대로 체육관에서……. 인사는 나중에 드리는 게 낫겠군요. 예, 바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아르주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
“체육관으로 가면 되나.”
“그래.”
“저 건물일까.”
카르나가 가리키는 쪽으로 아르주나가 시선을 주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쳐다보던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일단 가.”
카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이 빨라졌다. 자신 때문에 늦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카르나는 걸어가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체육관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르주나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카르나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에서는 이미 한창 연설이 진행중이었다. 연단 쪽으로 걸어가며 카르나는 그 위에서 연설하고 있는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익숙한 교복이었지만 어느 고등학교의 것인지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저건 어느 학교였지.”
“목소리가 너무 크다.”
“……미안하다.”
앞서 걷던 아르주나가 흘끗 연단 쪽을 쳐다보곤 대답했다.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군. 본 적이 있을 텐데.”
“그런 것 같다.”
“시 대표나 도 대표 선발전 때 봤겠지. 저쪽도 체육계로 유명한 학교니까.”
아, 그랬던가. 카르나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실력들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기억만 남아 있었다.
“……유명했나?”
“네놈의 실력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지 마라.”
“…….”
돌아보지도 않고 아르주나가 쏘아붙였다.
“네 기준으론 절대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렇군.”
“그보다, 남의 학교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이 다음다음이 바로 내 차례다. 그 다음은 너고.”
“…….”
카르나는 입을 다물었다.
연단 바로 아래에 서 있던 사회자가, 두 사람을 알아보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가까이 다가온 초로의 여성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아르주나를 먼저 돌아보며 말했다.
“아, 왔군요. 예상했던 도착 시각보다 늦어져서 걱정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르주나는 예의 그 웃음이었다. 카르나도 그 옆에서 작게 고개를 숙였다.
“순서는 다음다음이에요. 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괜찮습니다. 늦은 것은 저희인데요.”
“그럼.”
그녀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의 순서가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뒤에 온 다른 방송부 학생의 안내대로, 벽 가까이에 준비된 대기석에 앉았다.
1월 말부터 이런 날들이 몇 번씩 반복되고 있었다. 요는 학교 홍보 시즌인 것이다. 어떤 학교든 간에 학생이 없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현직 학생회장들이 나서서 시내의 중학교를 찾아가 각 학교를 어필하고 있다. 아르주나도 카르나도, 이 자리에는 각 학교의 학생회장으로 왔다. 늦는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앉은 카르나는 다급히 오느라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쳤고, 가방에서 안경 케이스를 꺼낸 아르주나는 안경을 벗어 닦기 시작했다.
시선을 들자, 연단의 뒤쪽으로 걸린 커다란 스크린이 눈에 들어왔다. 스크린 속 영상에는 지금 홍보 중인 듯한 그 학교의 여러 부활동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있었다. 시설적으로는 괜찮은 편의 학교다. 부활동을 장려한다는 멘트도 나왔다. 영상에 비치는 여러 부실의 모습 중, 짧게 지나가는 궁도장의 전경에 카르나가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주나.”
“시답잖은 얘기는 하지 마라.”
아르주나의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하지만 카르나는 주눅들지 않았다.
“왜 이번 대표 선발전에도 안 나온 건가?”
“…….”
아르주나가 혀를 찼다.
“……내 방금 질문이 네가 말하는 시답잖은 질문은 아니었을 텐데.”
“아니, 딱 그거군.”
“…….”
카르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안경을 낀 아르주나는 안경 케이스를 다시금 가방 속으로 밀어넣은 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대화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주목성이 높아서인지, 두 사람을 흘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르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르주나.”
“이제 그런 걸 할 시간이 없을 뿐이야.”
“그런 걸?”
“궁도.”
“…….”
“알 때도 됐을 텐데.”
마침내 카르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르주나는 연단 위의 사람과, 그 뒤로 펼쳐진 흰 스크린 쪽으로 몸을 틀어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회장으로서의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였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많은 지원 바란다는 멘트와 함께 연단 위의 여학생이 인사했다.
“그러면, 다음은.”
사회자가 다음 학교를 안내했다. 카르나는 비스듬히 앉아 아르주나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끝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학교의 대표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가 인사하자 학생들이 앉은 쪽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아르주나가 박수를 보내며,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안경 너머로 검은 눈동자가 다녀갔다.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못박는 식이었다. 카르나가 그 시선에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는 다시 앞을 향했다.
다음 순서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연설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아르주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나는 앉아 있었다. 그는 카르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가방만 자리에 둔 채로 연단을 향했다.
그가 준비된 자리까지 가는 동안, 앉아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저 사람이?”
“정말 올 줄은 몰랐는데.”
“아까 시작할 때엔 없었지.”
“늦게 왔나봐.”
“오겠지 생각은 했지만.”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모으는 사람. 그런 것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받아들이며, 아르주나가 마이크 앞에 가 섰다. 그곳에 서 있는 그는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당당했다.
카르나는 그와, 그의 뒤 스크린에 비춰지는 학원의 영상을 바라보았다. 같은 재단이라지만 당연하게도 서로 학교의 환경이 다르다. 학교의 특성 같은 것도 서로 다르다. 당장 카르나가 다니는 학교만 해도 도에서 유명한 체육계 고등학교지만, 아르주나가 다니는 학교는 진학교다. 영상의 구성이나 전반부의 내용은 같은 재단에서 나온 것이니 비슷했지만, 이쪽의 주 내용은 학원의 기본 편차치와 명문대 진학률이었다.
물론, 평균적인 학교의 편차치 수준이라든가 명문대 진학률 같은 것은 모른다. 그래도 수치가 그 정도면 상당하다는 것은 카르나도 알았다. 그 외에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학생 복지 제도의 안내 등에 대한 설명도 나왔지만, 그쪽은 카르나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홍보 영상이 끝나자 그는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아르주나 다음에는 카르나의 차례였지만, 카르나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아르주나의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했다.
“준비해 주세요.”
문득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카르나는 고개를 들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아.”
“곧 올라가시니까…….”
“응.”
그 말에 카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주나의 프레젠테이션도 슬슬 막바지였다. 카르나는 조금 전 아르주나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앞쪽으로 걸어갔다. 아르주나를 향해 있던 사람들의 시선 중 얼마가 그의 등을 향했다.
“본교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지닌, 성실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단에서 아르주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학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박수 소리 속에 아르주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자신감에 차 반짝이고 있었다.
연단 위로 올라가는 카르나와 엇갈려, 그는 아래로 내려갔다. 카르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래로 내려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살짝 손을 들어 인사했을 뿐이다.
마이크가 놓인 앞에 와 서자, 체육관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모인 학생 수는 아마도 3, 400명 정도. 새삼스레 많은 사람 앞에 서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카르나는 숨을 골랐다.
아르주나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아르주나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카르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을 태운 세단은 왔던 때처럼 꽃집 도로 앞에 멈추어 섰다.
“내일은 오후 2시.”
아르주나가 그렇게 말했다.
“50분에 미리 알람을 맞춰놔라.”
“응.”
“연락할 필요 없게 미리 준비해.”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고맙다.”
“…….”
아르주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빨리 가라.”
“네게 계속 폐를 끼치고 있으니까.”
“알면 지각하지 않게나 해.”
“그렇지만.”
“바쁘니 빨리 내려.”
마지막 말에, 카르나는 등을 떠밀려 차에서 내렸다. 인도로 올라온 카르나는 아르주나가 앉은 좌석 쪽 창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르주나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출발했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매끄럽게 사라져가는 것을 쳐다보던 카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처럼, 학교가 아닌 곳에서 아르주나가 의도적으로 카르나와 엮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아무리 눈치없는 카르나라고 해도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의 인연이다. 그 정도를 모를 리 없다. 카르나의 감사 표현을 거절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도로를 하나만 건너면 꽃집이고 자신의 방이 있음에도, 아르주나가 내려주고 간 그 자리에서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를 태워주고 오늘처럼 바래다 주는 것은 같은 재단 자매교의 학생회장들끼리 사이가 안 좋다 등의 부정적인 소문을 그가 원치 않기 때문이다. 카르나야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유명한 정치가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정계에서 은퇴를 한 지는 제법 되었어도, 아르주나의 형제들 중 아버지의 뒤를 이을 사람은 아르주나 한 명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런 소문을 꺼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소문을 꺼려서라고 해도, 카르나는 아르주나의 행동을 고맙게 느끼고 있었다. 카르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횡단보도로 향했다.
다음날에도 아르주나는 카르나를 데리러 왔다. 미리 10분 전부터 일을 정리하고 들어와 준비한 카르나는 2층의 창을 통해 아르주나가 탄 차가 오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언제쯤 들어오니?”
“두 곳만 다녀오면 됩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라.”
카운터를 보고 있던 마스터가 카르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르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어제와 같이 도로 쪽으로 나가 차에 탔다. 아르주나가 손목의 시계를 흘끗 쳐다보곤 다시 팔짱을 꼈다.
“…….”
대화도, 음악도 없는 것은 어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오늘은 목적지가 가까웠다.
차에서 내린 뒤의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늦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그 학교의 교장실에 들러 인사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체육관으로 안내 받았고, 거기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홍보를 했다. 정해진 줄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하면 됐다. 별다른 변수는 발생하지 않았고, 그대로 한 학교가 끝났다.
다음 학교로 곧바로 이동한 탓에, 그쪽 교장실에 들러 인사를 한 뒤에도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다. 거기다 이쪽에서는 체육관이나 강당 같은 곳에 모여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되면 교실로 방송을 송출할 예정이라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할 일이 없다. 거기다 두 사람은 거의 끝 순서였다.
“전전 학교 방송이 끝나면 호명하겠습니다.”
대기실로 안내받은 여러 고등학교의 학생회장들 앞에서, 방송부 부장이라는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호명된 학교의 학생회장님들께서는, 아까 안내받으셨던 대로 2층의 방송실에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소년은 바쁜 걸음으로 대기실을 나갔다.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 적당히 제자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자리들에 앉았다.
아르주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카르나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바깥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한 켠에 놓인 책장을 발견했고, 거기에서 아무거나 한 권을 집어들어 아르주나의 맞은편으로 돌아와 앉았다.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동화를 적당히 비튼 소설 같았다. 그동안 한두 명씩 대기실을 나갔다. 차례가 끝나면 대기실로 돌아오거나 하는 일 없이 곧장 각자 갈 곳으로 가는 모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수는 점점 줄었다.
마침내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카르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원래 있던 곳에 책을 꽂아두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아르주나가 안경 너머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중간까지밖에 안 읽은 것을 그냥 갖다두는 게 의아했던 모양이다.
“재미가 없군.”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아르주나가 묻지도 않았는데 카르나는 그렇게 말했다.
“안 물어봤다.”
“…….”
“오늘 뭔가 어색한데.”
아르주나는 가름끈을 끼우고 책을 덮었다.
“무슨 꿍꿍이냐.”
“그런 것은 없다.”
“수상해.”
“…….”
카르나는 대답을 망설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별 건 아니다.”
“…….”
다르게 말하면 뭔가 있기는 하다는 말에, 아르주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카르나는 옆의 의자에 두었던 종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뭐냐.”
“고맙다는 뜻.”
조금 전 찡그렸던 것이 1만큼이라면, 이번에는 2만큼이었다. 아르주나는 인상을 썼다.
“그런 건 필요없다고 했을 텐데.”
“내게도 염치가 있다.”
“없지야 않겠지. 필요없다고 했을 뿐이다.”
“대단한 건 아니다.”
“대단하든 아니든.”
카르나는 종이 가방 안에서 그 나름의 감사 표시를 꺼냈다. 이제는 3만큼 인상을 찡그린 채, 아르주나가 그걸 노려보고 있었다.
“퐁당 오 쇼콜라다.”
“…….”
“마침 옆 카페에서 팔고 있던 것을 사왔다.”
카르나가 들고 오면서, 차를 타고 오면서, 최대한 아르주나의 눈에 띄지 않게 뒤로 감춰 들고 오면서 흔들렸던 탓에 모양은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카르나는 케이크 케이스를 조심스레 열었다.
“맛은 보장한다.”
“……네가?”
“이 카페는 다 맛있다.”
“네녀석의 입맛을 생각하면, 맛없는 게 드물겠지.”
아르주나가 그렇게 쏘아붙여 왔지만, 어조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그렇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걸 내내 숨기고 있었던 거군.”
“…….”
부정을 할 수도 없고, 긍정을 하기도 애매해 카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포장된 포크를 상자에서 꺼내는 카르나의 머리 위로 아르주나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뭘 꾸미고 있나 했더니.”
“꾸민 건 아니다.”
“탈 때부터 수상했으니까.”
아르주나의 앞으로 포크를 밀어놓고, 카르나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신세 진 것에 대한 보답으로는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아르주나가 그렇게 대답했다. 어조는 비뚤었어도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카르나가 내민 것을 아르주나가 끌어당겨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네게도 맛있다면 좋을 텐데.”
“뭐지,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졌군.”
“감사의 의미로 산 것이니까, 네 맘에 별로 차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싶었을 뿐이다.”
“예상하는 정도의 맛이겠지.”
카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르주나가 포크로 쇼콜라를 조금 잘라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단 걸 좋아하나보군.”
“…….”
“다행이다.”
포크를 문 아르주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너, 설마.”
부드러운 쇼콜라마저도 목에 걸린 것 같은 얼굴로 그가 입술을 떼었다.
“설마.”
“?”
“아니, 어떻게.”
그러니까,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인 듯했다.
하지만 카르나로서는 오히려 그가 그 질문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아르주나가 초콜릿 종류를 좋아한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늘 시합 전에 초콜릿을 먹고 있었지 않나.”
“…….”
아르주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가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야.”
“그건 또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르주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의 행동에, 카르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를 전하고 싶었고, 그래서 네가 좋아하는 걸 고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는데. ……혹시 내가 말을 잘못했나.”
“…….”
무거운, 침묵.
아르주나가 대답하지 않으니, 카르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카르나는 무작정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아르주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했다.
“……이미 열었으니, 안 먹을 순 없겠지.”
그 말에, 카르나는 미소지었다.
“기왕이라면 다 먹어줬으면 좋겠군.”
“글쎄.”
내려놓았던 포크를 집어들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맛이 없다면 안 먹을 수도 있지.”
“그럴 리 없다.”
카르나는 힘주어 말했다.
“……저.”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나와 아르주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을 향했다.
“다음다음 순서, 셔서.”
방송부의 명찰을 단 여학생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언제부터 문이 열려 있었더라? 카르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합니다. 부르려고 왔는데…….”
“…….”
“어, 얼른 준비해 주시면…….”
“…….”
“감사하겠습니다…….”
여학생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달려가는지 발소리는 빠르게 멀어졌다. 큰 쓸모가 없을 배려에 다시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
앞에 놓인 쇼콜라를 바라보던 아르주나가, 다시 쇼콜라로 포크를 가져갔다. 그리곤 쇼콜라를 반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
카르나가 그걸 쳐다보고 있자, 아르주나는 반으로 잘린 쇼콜라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너도 먹어라.”
“하지만 이건 내가 네게 주는 감사의.”
“빨리 가야 하니까.”
그의 재촉에도 카르나는 머뭇거렸다. 그 태도에 점점 인상을 찡그려가던 아르주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카르나에게 물었다.
“설마 여분 포크가 없나?”
“응.”
“…….”
아르주나가 자신이 들고 있던 포크를 건네려는 순간.
고민하던 카르나는 아르주나가 반 잘라놓은 쇼콜라 조각으로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 조각을 집어들었다.
아르주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카르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손으로 들고 먹을 거라고는.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생지 사이로, 물렁한 생초콜릿이 흘러내렸다. 그런 걸 카르나는 손으로 답삭 집어들어 먹었다. 애초에 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작은 것도 아니었다. 입가에 묻은 것을 카르나는 엄지로 대충 훑어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핥았다.
“……!”
아르주나는 입을 딱 벌리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몫은 해치웠다.”
손에 묻은 초콜릿까지 핥아낸 다음, 카르나는 그렇게 선언했다. 아르주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 무슨 문제라도.”
“네놈…….”
“음.”
“비위생적이다.”
몹시 심란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카르나를 꽃집 앞 도로에 내려준 뒤, 아르주나를 태운 차는 아르주나가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기사는 아르주나가 탄 좌석 쪽의 문을 열어주고는 내일 같은 시각에 데리러 오겠다고 인사했다. 아르주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세요.”
“도련님도 푹 쉬십시오.”
기사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운전석에 탔다. 차가 집 앞 도로를 돌아나가는 것을 보고, 아르주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들어온 것을 인식한 현관 불만이 머리 위에 켜져 있었다. 구두를 벗고 들어가며 아르주나는 벽면을 더듬어 불을 켰다.
복도, 거실을 지나 드레스 룸에 가방과 자켓을 내려놓고 그는 침실로 곧장 들어갔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침실 불은 딱히 켜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그대로도 편했다.
아르주나는 꾸물거리며 침대의 중앙으로 갔다. 가지런히 정리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 그는 눈을 감았다. 저녁도 안 먹었지만 입이 달았다. 아까 먹은 퐁당 오 쇼콜라 때문이겠지. 맛은 있었고, 생각보다는 작지 않았다. 반을 나눠주긴 했어도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아르주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허리의 벨트를 풀었다.
벨트를 풀어 바닥에 적당히 던져놓은 그는 다시금 목까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카르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전히 단 걸 좋아하나 보군.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맞는 말도 짜증나게 말한다는 게, 그의 단점 중 최고의 단점이었다. 눈앞에 카르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주나는 소리내어 혀를 찼다.
기껏 좀 쉬려고 누웠는데도 교복을 입고 있어선지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아르주나는 다시 일어났다. 드레스 룸으로 간 그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지만 이미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는 등의 활동을 한 탓인지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 아르주나는 침실의 불을 켜고 침대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에는 생수 몇 통과 싸구려 초콜릿 음료 캔이 들어 있었다.
아르주나는 망설이다 캔을 집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집엔 사치스러울 만큼 넓은 식탁에 앉아 캔을 땄다. 카르나가 말한, ‘시합 전에 늘 먹고 있었던 초콜릿’은 이 음료를 얘기하는 거였다.
“…….”
몇 모금 마시고, 아르주나는 캔을 내려놓았다. 식탁에 앉으면 바로 보이는 벽 쪽에 장식장이 세워져 있었다. 아르주나가 여태까지 나간 대회에서 받은 메달이며, 트로피가 들어 있었다.
그 대부분이 궁도로 받은 것임을, 아르주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궁도를 할 생각은 없어진 지 오래다.
그것도 모르고 카르나는.
아르주나는 장식장 쪽을 빤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여전히 그때의 기억들에 스스로가 얽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에 오래 매여 있고 싶지 않았다. 아르주나는 캔을 들고 싱크대로 가 남은 것을 부어버렸다. 몇 모금 안 마셨지만 캔 자체가 크지 않아 내용물은 금방 비었다. 빈 캔을 옆에 올려두고 아르주나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메모지와 펜을 하나 들고 나왔다.
「사람 시켜 본가로 보낼 것.」
그렇게 쓴 메모지를 장식장에 붙인 뒤, 그는 켜져 있는 불들을 끄고 침실로 다시 들어갔다.
과거의 라이벌은 여전히 예리하다. 그러나 그 예리함에 어울려 줄 여유는 없었다. 잠도 오지 않는 베개에 머리를 묻으며 아르주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꿈도 꾸고 싶지 않은 이른 저녁이었다.
그날 밤 꿈에는 하필이면 카르나가 나왔다. 그 대기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카르나는 새빨간 혀로 손가락을 핥았다. 아르주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카르나의 입술이 물고 있는 것은 아르주나의 손가락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 아르주나는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았다.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날짜는 2월 14일에서 15일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