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카르나와 아르주나, 두 사람은 유명인사 축에 속했다. 서로 학교도 다르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하나의 스포츠에서 공통점을 보였다. 아르주나와 카르나는 같은 나이에 궁도를 했고, 어느 대회에서든 간에 결승에서 맞부딪쳤다.
중학교 3년 내내 두 사람은 비슷한 지점에 서 있었다. 한 대회에서 카르나가 우승을 하면 아르주나가 준우승을, 다른 대회에서 아르주나가 1등을 하면 카르나가 2등을 하는 식이었다. 당연하게도, 지역 신문이나 뉴스에서는 두 사람을 함께 엮어 올리곤 했다. 호적수라든가 숙명의 라이벌처럼, 두 사람을 같이 가리키는 말은 많았고 어느 한쪽도 그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치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각자가 고등학교를 택하면서 두 사람의 방향은 달라졌다. 카르나는 아르주나와 같은 재단의 체육계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아르주나는 진학교로 들어갔다. 그리고 1학년 때의 봄 대회 이후로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좋은 라이벌을 잃는다는 것은, 승패를 겨룰 만한 상대를 잃는다는 말과 똑같다. 카르나의 성적은 이후의 대회에서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하지만 아르주나만큼 그와 좋은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르주나는 대회에의 불참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그저 1학년의 겨울에서 2학년의 봄으로 올라가는 그 시기에, 잠깐 이야기가 돌았다. 꽤 오랫동안 정치인으로 명망 높았던 아르주나의 아버지가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그 아들들 중 아르주나 한 명을 자신의 후계로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궁도는 어디까지나 심신수양을 위한 교양 스포츠였던 셈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르주나 쪽은 언제건 그 비슷한 질문이 나오면 답을 모호한 말로 얼버무리고 끝냈다.
그렇다 아니다 확실한 것보다 애매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빨리 흥미를 잃는다. 그가 대회에 나오지 않는 채로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의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늘 1등에는 카르나가 있었고, 2등은 이렇다 할 사람 없이 바뀌어 왔던 것처럼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전환점이라는 것은 의외의 때에 찾아온다.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다들 생각하고 있었을 때에, 카르나와 아르주나 두 사람이 각 학교의 학생회장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학생회장이라는 위치에 대한 두 사람의 스탠스가 다른 것도 화제가 됐다. 아르주나가 궁도 선수로의 활동을 쉬는 대신 2년 간 학생회 업무를 주도하며 착실히 실적을 쌓아온 쪽이었다면, 카르나는 작년 학생회장의 특정 부활동 편애를 학생총회에서 지적하며 단번에 학생들의 호감을 산 쪽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맞설 만한 후보는 없었다. 선거가 끝나고 난 뒤 공개된 각자의 지지율은 거의 단일 후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또 다시 같은 위치에서 만나게 됐다. 긴 듯 짧은 듯, 알 수 없었던 1년을 함께했다.
그리고 이제 그 임기도 슬슬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2월의 절반이 지났다는 것은, 곧 3월이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3월이 가까워진다는 것은, 봄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학교에는 보다 다른 의미가 한 가지 있다. 학교 홍보 건이 마무리되기가 바쁘게 다음 일이 왔고, 이제는 그 일을 해결해야 할 때였다.
아르주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산 아래로 이어지는 길에 노을이 부드럽게 깔려 있었다.
지금도 도망갈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은 없다. 아르주나는 한숨을 내쉬며 잡았던 커튼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와 앉았다.
학생회실에는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온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아르주나는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 적어도 처음부터 예상치 못했던 전개는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태블릿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2월이 절반 지났다. 다가오는 3월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졸업식이다. 입학식은 학생회에서 준비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졸업식은 올해의 학생회에 남겨진 마지막 과업인 셈이다.
그 졸업식이 그의 졸업식이기도 하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이렇게까지 괴롭진 않을 텐데.
아르주나는 번뇌에 가득찬 표정으로 워드를 켰다.
작년 졸업식 준비 전반에 관련된 문서를 탭에 띄워놓고, 아르주나는 새 문서를 생성했다. 그 빈 화면에 올해의 연도를 기입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아르주나가 그 한 줄 짜리 글을 노려보고 있을 때, 멀리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가벼웠지만 워낙 복도가 조용했다. 선명하게 울리는 구두 소리. 아르주나의 시선이 문 쪽에 가 못박혔다.
소리는 학생회실 앞에서 멈췄다. 곧 누군가가 노크를 해 왔다.
아르주나가 들어오라고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카르나는 실례한다는 말 없이 슥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르주나가 근심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다른 임원들은.”
“피차 같은 상황인데 물어볼 필요가 있나.”
“…….”
카르나의 가차없는 대답에 아르주나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이런 날엔 끌고 와야지.”
“네가 할 말인가?”
이래저래 일대일로 보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상대였지만, 그런 아르주나의 상태를 알 리 없는 카르나는 곧장 아르주나의 맞은편 자리로 와 앉았다.
“일단 작년 자료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아르주나는 턱을 괸 채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작년 자료에 정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니까.”
“이미 봤다.”
“그런데 그렇게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건가?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는 게 효율적일 텐데.”
아르주나는 어깨로 한숨을 쉬었다. 카르나의 이 화법은 듣는 사람이 상황의 방관자일 땐 들어줄 만하지만 당사자일 때는 고통 그 자체였다. 절로 짜증스러운 어조가 됐다.
“조용히 해라.”
“…….”
“책임을 방기하고 도망간 건 다른 임원들이지 내가 아니니까.”
“그건 알고 있다.”
“알고 있다는 놈이…….”
카르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곤 태블릿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당일의 순서부터 확인하지.”
“…….”
결국은 아르주나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귀빈 안내와 개회사까지는 우리가 딱히 할 게 없다. 당일 학생회에 진행이 맡겨지는 건 재학생들의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부터. 보통 송사는 2학년 부회장이 하고 답사는 학생회장이 하는 게 일반적이니, 이쪽은 준비를 해야겠지.”
아르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이 졸업 축하 공연이었지.”
“응, 동아리 연합회 측엔 연락했나.”
“말은 해놨으니 공연 선정이라든가는 동아리 연합회 측에서 챙기겠지 싶은데.”
“공연 동아리와 공연 내용 확정을 받아야 졸업식 안내책자를 맡길 수 있으니까. 일단 그쪽을 재촉하는 게 좋겠군.”
“그러는 그쪽은.”
“네가 우리 쪽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겠지만 역시 오늘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에 분노가 치솟는다. 참을 인 자로 학생회실을 채울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아르주나는 입을 다물었다.
순서 전반에 대한 체크가 끝나고 나자, 그 다음은 당일 졸업식장의 환경 확인이 이어졌다. 무대의 기본적인 구성이라든가, 식장에 배치할 꽃이라든가.
“……그러고 보니 너희 꽃집, 이번 입찰에 참가했나?”
카르나가 고개를 들었다.
“하셨다고 들었다.”
“어떻게 입찰이 나갔는지 모르겠는데. 대충 알고 있으면…….”
“무대 정면 양 옆으로 대형 화환이 두 개씩, 출입구에 대형 화환 두 개와 소형 화환 여섯 개.”
“그건 작년과 똑같군. 그리고?”
“졸업생들에게 건넬 꽃도 한 송이씩 있다고 들었다. 생화로.”
“……그 꽃 둘 곳도 무대에 배치해야겠군.”
“300송이 정도 되니까.”
아르주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입찰 결과는 언제 나온다고 했지?”
“다음주 중이라는 것 같았다.”
“뭐, 올해도 그쪽에서 하면 의견 주고받기가 수월할 거고…….”
“음, 아마.”
이야기는 꽃에서 졸업식 안내책자로 넘어갔다.
“디자인은 작년에 썼던 것에서 사진을 바꾸는 쪽으로 진행하겠지.”
“굳이 올해 다른 양식을 택할 이유는 없으니까.”
“사진만 바꾸는 게 무난하고……. 날짜랑 요일, 시간만 두 번씩 체크하면 되겠군.”
처음에야 좀 미적거렸지만 아르주나도 이제 완전히 업무 스위치가 들어가 있었다.
“귀빈 초대장도 같은 양식으로 쓰겠지?”
“응.”
“바뀐 분들 명단이 있으니 확인해서 그쪽은 3월 되기 전에 나가야 해.”
“그럼 봉투 인쇄부터 들어가야겠군.”
“학생회에서 초대드립니다, 로?”
“다른 것도 봤지만 그게 제일 나을 것 같다.”
“뭐 다른 멘트로 보내봤자 어차피 우리 일이니까…….”
배당된 예산을 처리하는 일까지는 교사들이 하지만, 이런 학교 행사의 진행 전반을 학생회에 일임하는 것이 이 재단의 방식이었다. 물론 권한이 있는 만큼 일도 있는 법이다. 진행을 하며 빠뜨린 부분은 없는지 체크하며 두 사람은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래서 너희 학교 부회장들은 어딜 갔는데.”
부회장이 없어 본인이 정리차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자매교의 학생회장에게, 아르주나가 물었다.
“그걸 이제야 묻는 건가?”
“네놈은 묻지도 않았는데.”
“봄 대회를 앞두고 필살기를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
“또 한 명은 자연탐구.”
학생회장이 카르나인 학교다웠다. 아르주나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면에서 눈을 든 카르나가 물어왔다.
“너희 학교는.”
“우리 쪽은…….”
하지만 반격을 당하고 나니 아르주나도 할 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너무나 당당한 표정으로 탈주를 선언하던 부회장 둘의 얼굴을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이유였다.”
“?”
카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생각났다는 듯,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
“부회장 두 사람이 교제 중이라고 했던가?”
“……서로 그렇게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고,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신나서 쫓아다니는 거지.”
“교제 관계가 아니었나.”
“아, 그래, 차라리 가 주는 게 나았겠다.”
“일할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군.”
“그건 그래.”
한창 이야기를 나눈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자신 몫의 일을 대강 마친 아르주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밀폐된 공간에 있어선지 하품이 자꾸 나왔다. 안경을 내려놓고 눈꺼풀을 누르던 그가 중얼거렸다.
“좀 답답한데.”
“창문을 열까.”
“일단 온풍기를 좀 끄고.”
고개를 돌려 바깥을 쳐다보면,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집중하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주나는 온풍기를 껐다. 온풍기를 줄곧 틀어놨던 탓에 실내는 많이 건조했다. 거기다 계속 말을 해서 목도 아팠다.
“뭐라도 마시고 하지.”
아르주나는 테이블의 중앙에 놓인 전기 포트를 끌어당겨 열었다. 하지만 물은 바닥에 깔릴 정도로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르주나는 카르나를 향해 턱짓했다.
“……일단 물부터 받아 올 테니까, 마시고 싶은 거나 골라놔라. 창문도 열고.”
“응.”
창가로 걸어간 카르나가 뒤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아르주나는 전기 포트를 집어들고 학생회실을 나섰다.
모두가 하교하고, 교직원들도 퇴근한 뒤라서인지 건물 안은 조용했다. 복도에는 비상등의 초록색 불빛과 소화전의 붉은색 불빛만 들어와 있었다. 벽면의 복도등 스위치를 눌러 켜고, 아르주나는 급수대까지 걸어갔다.
밤의 학교는 적막하다. 전기 포트에 물 받는 소리가 유독 요란하게 들렸다. 학생회실의 공기와는 다른 차가운 공기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2월도 절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밤은 추웠다. 전기 포트에 절반 정도 물을 채운 뒤 아르주나는 빠르게 걸어 학생회실로 돌아갔다. 많이 받으면 괜히 오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학생회실 문을 열자 얼굴로 찬 공기가 훅 끼쳐왔다.
환기 정도면 그렇게 많이 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카르나는 창문을 전부 활짝 열어놓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전기 포트를 내려놓은 아르주나는 창가로 걸어가 절반을 닫았다. 카르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걸 쳐다보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아르주나는 손님용 머그컵을 그의 앞에 내밀며 물었다.
“마실 것.”
“핫초콜릿.”
“…….”
단답형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군말없이 아르주나는 마쉬멜로가 들어 있다는 광고 카피의 핫초콜릿 가루 통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컵과 카르나의 컵에 크게 두 스푼씩 넣었다. 가루에서부터 초콜릿의 단내가 올라왔다.
포트의 물이 끓을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날 즈음에야 아르주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돌아왔다.
카르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컵에 물을 조금 적게 붓고, 티스푼으로 저어 그 앞에 밀어놓았다. 자그마한 마쉬멜로 조각이 동동 떠 있었다.
“일어나라.”
“응.”
카르나가 곧장 눈을 떴다. 그리곤 자신의 앞에 놓인 컵을 내려다보았다.
“고맙다.”
“할 대접을 하는 것뿐이니까.”
카르나는 컵을 자신의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겼지만 뜨거운 탓에 쉽게 입을 대지 못했다. 그건 아르주나도 비슷하긴 했다. 한창 뜨거운 핫초콜릿이 한 김 식을 때까지 기다리며 두 사람은 각자 답사의 내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송사에서 한 얘기에 조금 덧붙이는 게 할 만할 텐데.”
“당장 없으니까.”
“이쪽은 송사를 쓰라고 밀어놔도 얼마나 할까 싶지만.”
“거기 학생회는 그 정도로 태만한 분위기인가?”
“……봄 대회에 대비해 필살기를 연습하러 간다는 학생회 임원을 둔 회장에게 듣고 싶진 않은데.”
“그의 경우는, 사정이 있어서겠지.”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카르나는 태연했다.
“필살기니 뭐니 하는 것이 변명이라는 건 알지만 그에게도 그런 변명을 해야 할 만한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네놈 머릿속은 정말 꽃밭이군.”
아르주나가 쏘아붙였다.
“만약 아르주나 네가 그렇게 걱정된다면, 마감이라도 정해 놓는 게 낫지 않겠나?”
“마감을 정한다고 해서 제 시간에 제출할 위인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안 정하는 것도 어려울 텐데.”
“여차하면 내가 송사 답사를 둘 다 쓰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
“…….”
“아, 역시 일단 이쪽은 빼고 진행하는 게 좋겠군.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그렇게 말한 아르주나는 열려 있는 탭에서 ‘답사’라고 쓰인 문서를 닫았다.
“그것 말곤 뭐였지, 축하 공연? ……그것도 무슨 동아리가 어떤 공연을 하는지 모르면 멘트를 못 쓰잖아.”
“그렇지.”
“작년 대본이나 수정해야겠군.”
아르주나는 탭에 자료를 띄웠다. 그리고 새 문서에 복사한 후, 스크롤을 내리며 수정을 시작했다. 연도와 날짜를 바꾸는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내빈의 소개나 대표상 등 내용이 상당히 달라지는 부분은 원래 문장의 형식만 남겨놓고 수정용 마크를 했다.
그동안 카르나는 핫초콜릿을 한 모금 마셨고, 입천장을 데었는지 떨떠름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아르주나는 그걸 보았지만 굳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카르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모른 척 태블릿의 화면에 집중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꽤 집중했던 모양이다. 뻑뻑한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아르주나는 이마를 짚었다. 넉넉하지 않은 화면을 계속 보고 있다 보니 자연히 몸도 움츠러들어, 자세를 바로하자 몸 여기저기서 소리가 났다. 아르주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쪽은 얼마나 진행했나 싶어 테이블 너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넘겨다보면.
“…….”
잠들어 있다.
“……하.”
입술 사이로 맥빠진 웃음 소리가 났다.
언제부터 자고 있었는지 생각해 봤지만, 집중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쨌든 카르나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고,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쥔 채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잠깐 졸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주나는 태블릿을 옆으로 치웠다. 어차피 같이 일할 사람도 열심히 자고 있는 판이다. 아르주나가 좀 쉰다고 한들 지적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피차 같이 사는 사람도, 늦게 들어간다고 해서 걱정할 사람도 없다. 그러니 학생회실 같은 곳에서 늦게까지 앉아 있는 거지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아르주나는 카르나가 세들어 산다는 꽃집을 떠올렸다. 아니, 나는 없지만 이쪽은 있던가.
카르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르주나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았다. 쓸데없이 평화로울 정도의 자는 얼굴이 눈앞에 있다. 한참 집중한 이후의 나른함도 있었다. 건조함 때문에 눈물이 고인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그는 자고 있는 카르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만 하지 않는다면 좋을 것 같은 얼굴이다. 그가 눈을 뜨고 말을 하는 순간부터 폭탄이 떨어진다는 것을 아르주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그가 말을 안 하는, 또는 안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순간이 마음 편했다. 거기다 이 순간의 그는, 아르주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
가만히 들어보면, 작게나마 새액새액 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카르나의 숨소리라는 정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라 우스웠다. 조용히 그가 숨쉬는 소리를 듣던 아르주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코웃음을 쳤다.
눈앞의 그와 알고 지낸 게 벌써 6년째다. 중학교 1학년의 가을 대회에서 만나 3년 동안 같이 궁도를 했고,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아르주나가 궁도를 그만두었음에도 또 다른 형태로 마주해, 이제 6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이다.
분명 친구는 아니겠지. 그렇게 말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라이벌이라고, 또는 호적수라고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궁도를 했을 때의 두 사람은 분명 그 승패를 가르는 자리에 마주 서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서로 다른 학교의 학생회장으로 있으면서 라이벌을 자처하는 것도 우습다. 궁도장에서 물러난 아르주나에게 승부를 겨룰 자리 같은 것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으음…….”
갑자기 그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아르주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좀 가까이 했던 것도 있다. 무슨 꿈을 꾸는지 몰라도 잠든 카르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척였고, 그의 손에 잡힌 머그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카르나는 깨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아르주나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테이블 위로 손을 뻗기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주나는 카르나가 앉아 있는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르나의 손이 여전히 닿아 있는 머그컵에서,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아무래도 손길은 조심스럽다. 자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닥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사이에서도 함부로 하기가 이렇게 꺼려지는 걸까. 아르주나는 겨우 그의 손에서 빼낸 머그컵을 옆으로 치웠다.
카르나는 아직 자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아르주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카르나의 옆에 서 있었다.
나쁜 일을 하려는 때처럼, 뱃속이 묵직했다. 이상하게도 스스로가 뭘 하려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금 전 머그컵에서 떼어낸 카르나의 손가락을, 아르주나의 손이 잡고 있었다.
“…….”
아르주나는 말없이, 자신의 손이 잡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가, 카르나의 미동 없는 눈꺼풀을 잠시 바라보았다.
얇은 손가락이다.
비스듬히 선 채로 그는 카르나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한참 후에 손을 놓고선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갔다.
카르나가 잠에서 깼을 때에는, 아르주나가 잠들어 있었다. 안경은 벗어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였다. 카르나는 앉아서 잠든 탓에 뻐근한 목과 어깨를 반대쪽 손으로 몇 번 주물렀다.
돌아보면, 시계는 어느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지간히 잔 모양이다. 저녁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배도 고팠다. 카르나는 잠들어 있는 아르주나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봤다.
“아르주나.”
“…….”
잠귀가 밝은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아르주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곧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표정으로 바로 앞에 놓인 안경을 집어들었다. 궁도를 하던 때의 그가, 학생회장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일어났군.”
안경을 낀 그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계속 보고 있던 건 아니겠지.”
“잠깐은 봤다.”
“…….”
아르주나의 시선이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향했다.
“늦었군.”
“음.”
“능률이 많이 떨어졌으니, 일어나지.”
그렇게 말하며 아르주나는 먼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가 태블릿을 가방에 넣고, 노트를 챙기기 시작했다.
“다음번엔 부회장들을 꼭 참석시키도록 해. 이대론 효율이 너무 나쁘니까.”
“효율의 저하는 인정한다.”
“그쪽 부회장들은 어쨌든 시키면 하잖아.”
“너희는 그렇지 않았지.”
순식간에 가방을 챙겨 자신의 앞에 둔 아르주나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 부정하진 않겠다.”
“…….”
“그쪽은 없는 게 효율적이야. 너도 마찬가지지만.”
“나 말인가.”
“그래. 그리고 지금도 그대로 앉아 있지.”
카르나는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미안하다.”
“알았으면 일어나라.”
아르주나의 말에 카르나도 태블릿과 수첩을 가방에 챙겨 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쇠는?”
“가지고 있다.”
아르주나가 단답했다. 놓고 가는 것은 없는지 테이블 위를 확인한 카르나가 문가로 걸어가자 아르주나는 학생회실 안을 한번 빙 둘러보았다.
“나가.”
그 말에 카르나는 바깥으로 나갔다. 곧 불을 끄고 나온 그가 문을 닫았다. 문단속은 그걸로 끝인 듯했다. 아르주나가 계단을 가리켰고 두 사람은 그쪽으로 걸었다. 복도의 불은 꺼져 있었지만 비상등의 불빛 덕에 아주 어둡진 않았다. 대충 학교를 배경으로 한 공포 영화에 나올 정도의 밝기였다.
“춥군.”
“2월이니까.”
입김은 하얗지 않았다. 카르나는 시린 손끝을 몇 번 쥐었다. 두 사람은 계단 위에서 전등을 켜고 아래로 내려가 다시 전등을 껐다. 그게 한 층마다 반복이었다.
5층에서 4층으로, 4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1층으로.
1층의 현관에 도착했을 때 아르주나가 말했다.
“문은 내가 잠글 테니 이제 가라.”
“?”
하지만 카르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아르주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가만히 있나.”
“문은 잠가라. 기다릴 테니까.”
여기는 아직 그가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학교 밖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르나는 아르주나에게 다시금 말했다.
“아니면, 잠그는 것을 도와줘야 하는가?”
“…….”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르주나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문 위의 잠금쇠 부분에 열쇠를 꽂았다.
찰칵, 하는 쇳소리가 났다. 아르주나는 유리문을 두어 번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는 카르나의 옆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카르나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르주나의 걸음은 빨랐고 금방 쫓아가긴 어려웠지만, 카르나는 언덕길을 따라 절반 정도 내려간 곳에서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아르주나?”
거기서 그가 발을 멈췄다. 워낙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하마터면 아르주나의 등에 부딪칠 뻔했다. 카르나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섰다.
“짜증나는 놈.”
“…….”
뒤를 돌아본 아르주나는 그렇게 내뱉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
그가 온갖 감정을 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가파른 언덕길을 뛰듯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르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를 따라잡기 위해선 카르나도 달려야 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서야 카르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학교 밖이다. 아르주나는 나와 거리를 두고 싶은 거다. 뒤늦게 생각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르주나의 변덕스러운 태도가 이해됐다. 자연히 걸음이 느려졌다. 카르나는 느릿느릿 걸었다. 기분 탓인지, 손에 든 가방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점점 좁혀지는 보폭과 함께 언덕길은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인적도 없는 길을 걸으며 아르주나는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스스로의 기분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이었지만, 이 기분은 누구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카르나는 알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경험에 비춰봤을 때에는 그 역시 아르주나만큼이나 그를 모른다. 그리고 카르나의 추측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 참을 길 없는 답답함을 그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며 되씹고 있었다. 아르주나는 그걸로 울분을 삭이며 걸었다.
그래, 너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그런 것들이 울컥 치밀어오르게 만든다.
함께 나갔던 마지막 대회가 떠오른다. 꼭 이런 흐름에서.
씩씩대며 걷던 아르주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멈춰섰다. 곪아드는 상처에서 고름이 새듯 긴 한숨이 샜다.
“…….”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주나는 이제 등 뒤 멀리 보이게 된 언덕길을 한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카르나가 오는 것이 보일까봐, 고개를 돌린 그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당연하게 있어왔던 것이라면 언제부터인가 거기에 없었던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라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제발 그러길 바란다.
등을 돌린 아르주나는, 늘 그랬듯이 도망쳤다.
시상식 전 대회장을 빠져나왔던 3년 전과 똑같이, 그 이후 3년 내내 그랬던 것처럼.
카르나가 집에 돌아온 것은 12시가 넘어서였다.
당연하게도 꽃집의 불이며 간판까지도 모두 꺼져 있었다. 카르나는 윗부분이 둥근 흰색의 동화풍 문 앞에 선 채, 불 꺼진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내부가 희미하게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 무엇이 있나 보려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고 싶었을 뿐이다.
마침내 그는 문의 분위기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한 흰색 도어락의 커버를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전자음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그는 문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곧이어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카르나는 어둠 속에서도 가게 중앙에 있는 대형 화분 스탠드를 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드라이플라워들이 걸려 있는 장식장 쪽까지 와서는 조금 주위를 더듬거려야 했지만, 곧 그 뒤편에 있는 계단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난간을 잡고 올라갔다.
계단 아홉 개, 중간, 계단 일곱 개. 그리고 방의 바닥.
오른손으로 벽면을 더듬자 스위치가 만져졌다. 불을 켜면 익숙한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르나는 신발을 벗어 비어 있는 신발장의 아래칸에 넣었다. 신발장 옆에는 옷장이 붙어 있는 구조여서 바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카르나는 다시 불을 껐다. 어차피 곧 잘 거니까. 그리고 텅 빈 방을 가로질러 침대로 갔다.
커튼을 걷어놓고 갔던 탓에 오후 시간 내도록 햇볕을 잔뜩 머금은 매트리스에선 맑은 냄새가 났다. 비슷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누운 뒤에야, 카르나는 천장의 온풍기가 가동되고 있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방은 춥지 않았다. 아마 마스터가 켜놓고 간 모양이다.
핸드폰으로 감사하다는 메시지라도 보낼까 싶었지만.
추운 곳을 걸어와서 막 따뜻한 곳에 누웠더니, 옷장 앞에 놓은 가방을 가지러 가기도 쉽지 않았다. 눈이 절로 감기고 있었다.
곧, 떨어져내리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