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디페스타에 성인본으로 나옵니다. 얇은 책이 될 예정이라 짧게 공개합니다.
재의 냄새가 났다.
카르나는 눈을 떴다. 한밤중이었고, 창밖에 달이 떠 있었다. 몸을 추슬러 일어나 앉은 카르나는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았다. 흰 격자 사이로 뜬 달이 창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벌렸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목이 잠겨 소리가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몇 번 기침을 한 다음에야 들어줄 만한 목소리가 나왔다. 머리는 무거웠고, 몸도 마찬가지였다.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팔다리를 겨우 침상 아래로 내렸다. 벽을 짚고 일어난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익숙한 풍경이 있었다.
카르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 공기가 얼굴과 목덜미를 스쳤다.
여기는 두료다나의 궁전에 있는 그 자신의 방이다.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그의 방일 수 없기도 했다.
카르나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깨어나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천천히 반추했다.
전쟁터에서, 그의 전차는 달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함성과 비명이 오르고 피가 튀었으나, 카르나가 겨냥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아르주나.
그의 대척에 선, 축복받은 영웅.
전쟁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전세는 터무니없을 만큼 적에게 유리했다. 이미 수많은 형제를 잃은 두료다나 군의 패배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카르나는 아르주나와의 승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피부와 같이 붙어 있던 황금 갑옷을 떼어낸 팔과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내려 발등을 적셨다. 그러나 카르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저 멀리, 유디스티라의 군에 합류하려 하는 아르주나의 전차만이 아주 커다랗게 보일 뿐이었다.
카르나는 본대 쪽으로 달려가는 아르주나의 바로 뒤쪽으로 화살을 쏘아 날렸다. 물론, 맞추려고 쏜 것은 아니었다. 큰 소리를 내며 그의 옆으로 비껴간 화살을 보고 아르주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르주나가 그를 알아보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전차의 방향을 돌린 아르주나는 카르나가 있는 쪽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 화살은 카르나의 귀 바로 옆을 스치고 한참 뒤로 날아가 땅에 패인 자국을 남겼다. 카르나는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메겨 쏘았고, 갚아주겠다는 양 다섯 개의 화살이 다시 날아왔다.
아마도 마지막 싸움이 되리라.
그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카르나는 보란듯이 일곱 개의 화살을 메겼다. 죽음이 가까이 왔음은 알고 있었으나 전사로 태어난 이상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고 상대는 결코 나란히 설 수 없을 숙적이다. 카르나는 주문을 담아 화살을 쏘아보냈고, 아스트라의 연격이 돌아왔다.
전차는 흔들리며 간밤의 비로 젖은 평원을 내달렸다. 아르주나의 공격에 카르나도 아스트라를 사용해 응전했다. 하지만 마력의 집약체나 다름없는 그의 갑옷을 내어주고 난 뒤의 일이다. 카르나가 쏘아내는 아스트라의 위력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반면 아르주나의 공격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의 공격이 전차의 바퀴 옆으로 내리꽂힐 때마다 전차는 크게 흔들렸고, 싣고 있는 무기들이 장난감마냥 튀어올랐다.
그러니 그렇게 험하게 내달리던 전차의 바퀴가 진창에 빠진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진창에 빠진 바퀴가 전차의 속도를 견뎌내지 못하고 떨어져나갔다. 한쪽 바퀴가 빠지고 급격히 중심을 잃은 전차가 뒤집어지며, 카르나는 바깥으로 튕겨져나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몸은 땅바닥을 굴렀다. 땅이 그의 몸을 몇 번이고 두들겨때렸다. 몸의 어딘지 모를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카르나가 겨우 고개를 들고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아르주나의 전차는 그의 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전차 위에서 아르주나는 카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섬김받는 신처럼, 동시에 칼을 든 왕처럼.
공명정대한 눈, 그러나 적에게는 끝없이 잔인한.
아름다운 영웅, 키리티.
카르나는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아무 흔적도 없을 수는 없을 텐데, 없었다. 정말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카르나는 손을 내려 창을 닫았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방을 거침없이 가로질러, 그는 걸어왔다. 카르나는 달을 등지고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희뿌옇고 가냘픈 달빛 속에서 옆얼굴을 드러냈다. 선이 또렷하고 아름다운 얼굴,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카르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르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침상으로 걸어가 누웠다. 카르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르주나는 흰 예복 차림이었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 카르나가 누워 있던 곳에 그대로 누운 그는 카르나에게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눈을 감았다.
카르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반듯하게 침상 위에 누운 그의 모습은, 제단에 올려지는 번제물과도 닮아 있었다. 재의 냄새가 났다. 카르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아르주나의 숨소리를 세었다.
달빛은 침상 위로 희미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가 입은 옷의 무늬를 따라 조금 더 진하게 반짝이기도 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걸 아름답다고 느꼈다.
카르나는 다시 목을 만졌다. 하지만 상처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만들지도 않은 상처가 이제 와 생겨날 리도 없다. 카르나는 목에서 손을 떼고, 창문과 맞닿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드는 곳까지만 살짝, 밝았다.
생각해 보면, 승패가 너무나도 분명한 전쟁이었다.
카르나와 그의 벗이 걸어온 행적은 영웅이라기엔 지나치게 속물적이었으며, 실리를 추구할 뿐인 길이었다. 반면 판다바들은 역경을 견뎌내며 신의 은총을 받았고 마침내 잃은 것을 찾으러 왔다. 그러니 그들에게 승리가 돌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카르나는 두료다나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이기고자 싸웠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분명히, 카르나는 그렇게 느꼈다. 피할 수 없는 전쟁, 시작하기 전에 이미 현명한 이들은 받아들이고 만 패배, 의미없을 귀환의 약속들.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 저물녘 속에 서 있는 감각. 그 속에서도 카르나는 전장으로 나아갔고, 수많은 적들의 목숨을 앗았다. 그는 패배할 운명의 왕을 위해 무기를 들고 싸웠다. 그리고 그 결과로, 빛나는 영웅과 그의 화살을 두 팔로 맞이했다.
아니, 맞이했던가?
그랬다면 살아 있지 않을 텐데.
문이 닫히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뜬 카르나는 침상에 먼저 시선을 주었다. 침상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아르주나는 거기 없었다.
아르주나가 나가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카르나는 속이 허한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머리는 묵직했고 팔다리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할 만큼 흐느적거렸다.
카르나는 더듬거리면서도 문까지 걸어갔다.
복도를 밟는, 말간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소리를 잃어버릴세라 카르나는 자꾸만 휘청거리는 걸음을 버텨냈다. 언제나 네 명의 시녀들이 당겨 열던 문을 힘겹게 어깨 한쪽으로 밀어내고서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마주한 회랑의 풍경은 인기척이 없어졌을 뿐 이전과 별다를 바 없다. 두료다나는 자신의 왕국보다도 이곳에 오래 머무르는 카르나를 위해 흰 대리석과 상아로 이 회랑과 방을 꾸몄다. 정말로 사람이 없다뿐이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어서, 어째선지 전쟁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외로운 것이기도 했다.
박제된, 과거.
고개를 돌린 카르나는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흰 옷의 남자를 발견하고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반듯하게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누구의 것인지는 더 생각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르주나다.
그가 유일하게, 카르나마저 포함되어 있는 이 박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다.
카르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그날의 전투 이후 내내 누워 있기만 했던 몸에 그만큼 움직일 힘이 남아 있을 리도 없다. 당연히 그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아르주나.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쫓아가던 카르나의 몸이 한순간 바닥으로 무너졌다. 차디찬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카르나는 넘어지듯 쓰러졌다. 몸 여기저기가 부딪혀 아팠다.
살아 있다는 것이 슬펐다.
그럴 수도 있구나, 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절로 눈이 감겼다.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에, 카르나는 차가운 바닥에 몸을 내맡기고 축 늘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누군가가 그를 들어올렸는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카르나의 의식도 희미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는 카르나를 두 팔로 안아올린 채 걸었다. 머리를 기댄 그의 어깨에서 규칙적으로 심장이 뛰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당장 붙잡을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