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g,









-이번 도 내 고교 궁도 대회 개인전의 1등은, 1학년 아르주나 선수가 당당히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멘트는 텔레비전 아래에 자막으로도 뜨고 있었다. 개인전 1, 아르주나.


잠시 꽃집 문을 닫아가면서까지 보던 경기의 결론이 난 것이다. 마스터는 나가지도 않은 경기를 굳이 챙겨볼 필요까지 있냐며 투덜거렸지만, 카르나가 보고 싶다고 하자 손님들이 와 방해하지 않도록 영업중 간판을 뒤집어 달아줬다.




끝났어?”


.”




가게의 텔레비전은 그렇게 크지 않고 또 텔레비전을 볼 만한 자리도 넓지 않았다. 카르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작업용 책상으로 가 매출을 정리하던 그가 고개를 내밀어 텔레비전을 넘겨다봤다.




우승했나보네.”


.”


카르나가 안 나가서 그래.”


오늘의 아르주나는 제가 있었어도 우승했을 겁니다.”




그만큼 훌륭한 경기였다. 카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폈다. 마지막 결승전에서는 자신의 경기도 아닌데 잔뜩 긴장해 몸을 구부리고 보고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계속 앉아 있었던 탓인지 어깨와 허리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화면 속에서는 해설위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학교 선수권에서부터 유명했던 선수였지요. 이번 대회에는 오랜 라이벌이었던 카르나 선수가 불참하면서 예선전부터 압도적인 성적을 거둬왔습니다만.


결승전에서도 밀도 높은 경기력을 보여주는군요. 훌륭합니다. 1학년 선수답지 않은 관록과 침착함이었어요.


경기장에 바람이 심해 웬만큼 경험 많은 선수들도 애를 먹었는데 말이죠. 워낙 견실한 타입의 선수라서인지, 당황하지 않고 좋은 경기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영 표정이 밝지 않은데요. 역시 라이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카메라가 바뀌며, 경기장에 있는 카메라가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아르주나의 표정을 비췄다.


아르주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감독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클로즈업되었지만, 소리까지는 잡아낼 수 없는 듯했다.




카르나 선수와 아르주나 선수, 두 사람 다 중학 선수권부터 라이벌로 유명하기는 했지요. 전국 대회에도 거의 번갈아가며 랭크인했었고요.


카르나 선수의 이번 대회 불참 원인에 대해선 들으신 것 있습니까?


어깨 부상으로 인한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역 신문에도 났었지요.


, 그랬습니까?




카르나는 자신의 어깨를 매만졌다. 다른 곳에서, 그의 주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그의 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야, 오늘 이 정도 컨디션의 아르주나와 같이 실력을 겨루지 못 하게 된 건 안타깝긴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었던 겁니까?


경기 2주 전에 시내에서 있었던 4중 추돌사고에서, 차에 갇혀서 못 빠져나오는 아이와 어머니를 구하려고 사고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하더군요.


, 그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네.”




카르나는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 그랬군요?


그 주변 정체 때문에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이었거든요. 화상과 탈골 등으로 전치 6주라고.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는데.”


아니, 심각했는데.”


…….”




카르나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현장은 마스터와 꽃배달을 다녀오던 중에 보게 되었고, 차 속에 갇혀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던 것뿐이다. 두 사람을 구한 결과로 어깨를 다치고 대회에는 못 나가게 되었지만,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게 틀림없다. 어쨌든 두 사람을 구했다. 어깨 정도야, 사람의 목숨과 비할 바가 안 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 이제 시상대가 준비되었군요. 시상식이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이번 대회에서는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대결을 볼 순 없었지만, 카르나 선수는 가을 대회면 출전이 가능할 거라고 하니, 다음 대회를 기대해 봅니다.


고등학생이 되면 또 경기의 내용이 달라지니까요. 두 선수가 하루빨리 경기장에서 재회하는 날이 기대되는군요.




바뀐 카메라가 비어 있는 시상대와 그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2등과 3등으로 입상한 선수들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그 카메라에 비춰지지 않았다. 카르나는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까 전 경기장에 남아 있는 건가? 하지만 시상식이 곧 시작하는데, 감독도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했다.

 



무슨 일이죠? 아르주나 선수가 안 보이는데요.


그러게요.




해설위원들의 목소리에도 당혹스러움이 섞였다.


카메라가 바뀌며, 경기장 곳곳을 비췄지만 아르주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시상대 쪽으로 돌아온 카메라가 서로 당황한 표정인 채 이야기를 나누는 심사위원들을 비추었다.


카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야?”

 



마스터가 카운터 너머로 몸을 내밀어왔다.




아르주나가 없어져서…….”


.”




카르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다시금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곧 오겠지 뭐.”




그렇게 말하고 마스터는 다시 작업용 책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등을 돌려 간 바로 다음 순간, 해설위원들이 자세를 고쳐앉으며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안내입니다만, 아르주나 선수가 그, 건강 상태가 급격히 좋지 않아져 시상식에 불참한다고 합니다.


현장에서는 2등과 3등의 시상식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예선 때부터 참았는데, 도저히 시상식까지 마치고 갈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하네요.




카르나는 눈을 깜박이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조금 전 화면에 나왔던 아르주나의 표정은 아픈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에 대해 짜증을 내고 있다면,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지.


현장은 다들 당황스러운 분위기였다. 시상대에 올라가는 선수들도 서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의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시상식은 정말로 그가 없는 채로 어정쩡하게 끝을 맺었다. 카르나는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아르주나는 그 대회 이후로 다시는 궁도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때 꿈을 꿔서인지, 카르나는 영 심란한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당장 그때의 그는 가을 대회에서 아르주나와 결승전을 치르게 될 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제대로 된 승부조차도 겨뤄보지 못했는데, 얼마 전의 아르주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걸 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아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게 안타깝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카르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휑뎅그렁한 벽에 하나 걸려 있을 뿐인 벽시계가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중이라면 지각일 시간이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다. 꽃집의 오픈 시각은 9. 이제 내려가서 씻고 아침을 먹으면 대강 오픈에 맞출 수 있다.


카르나는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발을 꿰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오른쪽에 화장실 겸 세탁실이 있다. 주거용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의 기준에선 안락할 리 없는 곳이지만, 그보다 더한 곳에서도 있었던 적 있는 카르나에게는 충분했다.


가로로 긴 화장실의 한쪽 끝에는 세탁기가 놓여 있고, 그 반대편에 샤워기와 세면대 등이 있다. 카르나는 제일 먼저 세수를 하고, 좁은 공간에서 허리를 구부려 가며 머리를 감았다. 미닫이장에서 수건을 꺼내 머리를 말리며 밖으로 나갔을 때, 막 들어오던 마스터와 마주쳤다.


카르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일어났네.”


.”


오늘 그녀석 온댔나?”


…….”




카르나는 잠시 그 대명사가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일지를 고민했다.




.”




아르주나다.




언제쯤?”


오후 1시에 오기로 했습니다.”


한참 남았네. 아침 먹고 와. 준비는 해 둘 테니까.”




그가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옷 정도는 갈아입고 가는 게 좋으니까.


옷장에는 가게의 유니폼과 여벌의 셔츠, 그리고 두어 벌 정도가 되는 사복이 들어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 유니폼을 골라내기란 어렵지 않다. 카르나는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앞치마만 따로 가지고 내려와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마스터는 벌써 냉장고 앞에 앉아 어제 저녁에 들어온 꽃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향해 카르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라.”




아침을 먹으러 간다고 해도, 거창한 것은 아니다. 메뉴도 장소도 늘 정해져 있다. 바로 옆 건물의 카페다. 지난번 아르주나에게 답례로 사 간 퐁당 오 쇼콜라를 파는 곳이기도 하다.


동네 카페인 탓에 오픈도 빠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미 동네 주민들 몇몇이 와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카르나를 알아본 바리스타가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카르나는 카운터로 곧장 가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가져다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늘 앉는 자리에 가 앉았다.


내다본 창밖으로는 주말 이른 아침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운동복을 입은 사람도, 장바구니를 든 사람도 있다. 사람들에서 조금 시선을 옮기면, 겨울의 모습에서 변해가는 가로수들이 보인다. 벌써 잎을, 꽃송이를 머금은 가지도 보인다.




벌써 3월이네, 그치.”




카르나의 앞에 토스트를 내려놓은 바리스타가 말했다. 카르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대학, 정해졌다면서?”


.”


통학?”


기숙사요.”




그녀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기숙사? 그럼 아예 그쪽으로 가는 거야?”


주말엔 여기 와서 일을 돕고 가려고요.”


, 장학생으로 갈 수 있는 학교 중 고른다고 해서, 축하하려고 했는데.”




카르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토스트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자주는 못 보겠네.”


.”


좀 아쉬운걸.”




그 말엔 카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매일 와.”


…….”




바리스타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카르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접시로 시선을 떨궜다.


3. 졸업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식이 끝나면 이곳에 카르나가 남아 있을 이유는 없어지게 된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아 있는 거리다.


카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돌려주지 못한 것들도 많아.


보고 있자면 떠올랐다. 



 




 

아르주나는 시간을 딱 맞춰 왔다.


문에 손을 댄 순간이 정확히 오후 1.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작업용 책상 앞에 카르나가 서 있었다.




, 왔나.”


…….”




아르주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쪽에는 꽃집 주인이 앉아 있었다.




왔네. 카르나, 올라가봐도 돼.”


그럼…….”


.”




카르나는 들고 있던 포장지를 서랍장에 돌려놓은 후, 아르주나에게 눈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카르나가 가는 대로, 아르주나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드라이플라워와 하바리움의 재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장식장 뒤쪽으로 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엔 좁았다. 아르주나는 카르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 가팔랐지만 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카르나는 가게용 슬립온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아르주나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서 있자, 그는 그냥 구두를 신고 들어와도 된다고 말했다.




…….”




웬만한 집이었다면 그렇게 구둣발로 들어와 있는 게 꺼려질 법도 했겠지만.


카르나의 방은 원래 창고였던 2층을 개조한 것이다. 바닥은 나무바닥, 그리고 워낙 아무것도 없어 먼지가 잘 깔렸다.




들어와라.”


……문도 없지만.”




아르주나는 그렇게 덧붙이곤, 구두를 신은 채 발을 들였다.


방 안에 있는 것은 정말로, 침대, 책상, 의자, 옷장, 신발장 이 다섯 가지가 전부였다. 그나마 벽에 못을 박아 교복을 걸어놓은 것이 벽을 꾸민 것이라면 꾸민 것이라 어렵게 말할 수 있을 듯했다. 아래층과 맞추어 도색한 베이지색 벽이 무색할 만큼 황량했다.




실례.”


그러고 보니 여기엔 처음 오던가?”


올 일이 없었지.”




1년 동안 함께 연합학생회 일을 하면서도 처음 들어와 본 방이었다.


둘러볼 것도 없는 방 안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둘러보는 아르주나를 돌아보며 카르나가 말했다.




앉아라.”




카르나의 말에, 아르주나의 시선이 그쪽으로 움직여 갔다.


카르나는 침대 앞에 끌어다 놓은 의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




그리고 본인은 침대에 털썩 앉았다. 커튼을 걷어놓은 창문 가득 스미는 햇볕에, 먼지가 반짝거리며 날렸다.




거기 앉으라는 건 아니겠지.”


네 자리는 의자다.”


…….”


대체 왜 책상을 놔두고?”


의자가 하나뿐이다.”


…….”




아르주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카르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한다는 얼굴이었다.


방 안을 둘러봤지만, 정말로 방 안에는 의자가 그것 하나뿐이었다. 결국 아르주나는 그 자리에 가 앉았다. 서서 보면 안 됐던 건가? 하고 아르주나가 물었지만 카르나는 그럴 순 없다고 단언했다. 쓸데없는 그 손님에 대한 배려 때문에, 더 어색하기 그지없는 구도 속에서 아르주나는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작년에 썼던 화환 사진이다.”


…….”


이건 이쪽 학교는 아니고, 다른 학교에 납품했던 것.”


…….”


특별한 요구 사항이 없다면 전년도와 같은 걸로 하려고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낙찰된 가격대에서 맞출 수 있는 걸 몇 개 더 보여주겠.”


…….”


……어디 불편한가?”


그래.”


그럼 네가 침대에 앉겠나? 이쪽이 좀 더 쿠션이 있기는 하다.”


내가 남의 방에 와서 주인을 쫓아내고 그 침대에 앉을 만큼 철면피로 보이나.”


무슨 문제라도?”




정말 의아하다는 카르나의 어조에 아르주나는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됐다. 빨리 보여주기나 해.”


.”




카르나가 사진 몇 개를 넘겼다. 대충 이 정도, 라고 말한 뒤 카르나는 워드를 실행시켜 졸업식 관련 문서를 열었다.




작년이랑 같은 게 좋겠나?”


처리상으론 그게 제일 심플하겠지.”


대형 소형 둘 다?”


보기에도 제일 괜찮아 보이고.”


졸업생 생화는 어떻게 할 건가?”


장미가 무난하겠지.”


.”


색은 어떻게 맞추지, 보통?”


색보다는 종에 맞추는 편이다. 한 송이로도 잘 나가는 건 다마스크 로즈.”


어떤 건데.”




카르나는 갤러리를 다시 열어 보여주었다. 꽃잎이 촘촘하고 봉오리가 큰 장미를 보여주자, 아르주나는 낮게 목을 울렸다.




…….”


아니면 이건?”


어디.”




아르주나는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하지만 테이블이 없으니 영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나도 태블릿을 돌려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 옆은 또?”


잠깐.”


…….”




몸을 틀어 갤러리를 넘겨주던 카르나가 불편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주나의 옆으로 와 섰다. 하지만 그것도 사진 두어 장을 보고 나선 아르주나가 불편해졌다.




앉아라.”


네가 궁금해하지 않았나.”




그러니 편히 보여주려면 이렇게, 라고 나올 법한 뒷말을 생략한 채 카르나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르주나는 카르나의 팔을 잡아당겨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잠깐 여기 앉겠다.”




불편한 맘으로, 침대에 앉았다.




사양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는데.”


넌 날 대체 얼마나 거침없는 인간으로 보는 거냐.”


그렇지 않은가?”


…….”




더 말해봐야 이쪽의 속만 탄다.


아르주나는 옆에 앉아 카르나에게 턱짓했다.




넘겨봐라.”


.”




확실히, 옆에 앉으니 보기는 훨씬 편했다. 카르나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절반, 아르주나의 허벅지 위에 절반씩 태블릿을 걸쳐놓고 사진을 넘겨주었다.




……일단 이 시즌에 들어오는 장미 종류는 이 정도까지다.”


.”


어느 게 제일 나은가?”


제일 처음에 봤던 게 좋겠는데.”


소량은 가격이 높지만, 대량으로 주문하는 거라면 그쪽과도 이야기해 볼 만하다.”


그럼 그걸로 알아봐 줘.”


. 색깔은?”


색은 가격을 맞춘 다음에 해도 상관없으니까.”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고 보니 대형 화환 쪽에 들어가는 리본이, 작년에 썼던 것은 더 이상 안 나오게 되어서.”


그것도 정해야 하나.”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인 자체를 같게 간다면, 그때 그 리본에서 얇은 라인이 한 줄이나 두 줄 정도 들어가는 것이나…….”


보여줘 봐.”




카르나가 새 폴더를 열었다. 아르주나는 진지한 얼굴로 카르나가 이따금 덧붙이는 설명을 들으며, 몇 가지 리본의 샘플 사진들을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어깨와 팔이 맞닿아 있었지만, 그걸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는 쪽은 한 사람인 채로.


아르주나는 스스로에게 지금 이 상황에서 팔을 빼며 멀리 떨어지는 것도 이상하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얼굴색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태블릿의 화면 위로 비스듬하게 햇볕이 들고 있었다.






 

 

꽃 준비와 같은 무대 전반적인 사항의 윤곽이 잡혀갈 무렵, 카르나는 잠깐 꽃배달을 다녀오겠다며 일어났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대형 화환을 갖다주고 온다는 것이었다.




차로 갔다오는 건가?”


아니, 그 주변은 주차를 하기 어려워서. 마스터와 둘이 다녀올 거다.”


…….”




아르주나는 수만 번뇌를 겪은 사람의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정리를 하고 있으면.”


……내가, 굳이 네 방에서?”


어차피 확정된 사항을 마스터에게 전달하고 가야 하지 않나? 집에 돌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다면 내일 또 와야 할 텐데.”


…….”




유선상으로 설명하거나 메일로 전달하기보단,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제일 깔끔하긴 하다. 쌍방이 의견 교환도 할 수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도 자리를 비운 방에 앉아 있기란…….




일단 다녀오겠다.”




바쁘다며 카르나는 내려가버렸다.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된 아르주나는 침대에 앉은 채 이마를 짚었다.


일단, 아르주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옆의 의자로 다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태블릿을 켜, 조금 전 카르나가 공유해 주었던 클라우드에서 자료를 내려받았다.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지어 놓았기 때문에 정리할 것도 얼마 없었다. 자료를 다운로드받고, 몇 줄에 형광 마킹을 하고. 그게 끝이었다. 결국은 의견 교환을 위해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셈이다.


핸드폰의 시계를 다시 보자, 카르나가 내려간 시각으로부터 딱 6분이 지나 있었다. 아직도 그 일행이 돌아오려면 15분 정도 남았다.


주인도 없는데 1층에 내려가는 것은 어색해, 아르주나는 의자에 그대로 앉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괜스레 문자나 다른 연락이 오는 것은 없는지 몇 번 확인해 봤지만 이런 날엔 꼭 찾는 사람이 없다.


아르주나는 초조하게 핸드폰의 액정을 문지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




카르나의 방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아마 이 이후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르주나는 그런 것을 떠올렸다.


긴장할 필요 없다. 긴장할 필요 없다.


아르주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거의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창가와 그 창가의 커튼을 활짝 젖혀둔 방 안에서는 햇볕에 잘 마른 세탁물의 냄새가 났다. 커튼만 걷어놔도 햇볕이 그대로 들어오는 자리라 그런 듯했다.


아르주나는 책상 쪽을 돌아보았다. 의자가 빠져 있는 것 말고는 잘 정리된 책상이다. 조금 가까이 가 둘러보면, 책상의 정면을 받치는 형태로 배치된 책장에 문과 계열의 참고서와 교과서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학교 자체야 체육계라고 해도, 기본적인 학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들 학교가 속해 있는 재단은 학문적인 성취를 중요시하는 곳이다. 그러면서 어느 쪽을 좀 더 신경 썼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반 학생들의 입학으로는, 카르나가 다니고 있는 학교 쪽도 편차치가 높은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 학교에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갔으면서도 카르나의 성적은 우수하다. 애초에 회장 후보로 입후보하는 데에도 기본적인 성적이 요구되고, 이 학교는 그 성적도 높은 편이니까. 카르나의 입학이 내정된 대학도 그렇고.


대학.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을 꺼내 남은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11.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 아르주나는 그 옆의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옆의 벽에는 다른 것도 아닌 못이 두 개 박혀 있었고, 거기에 각각 옷걸이가 걸려 있었다. 위쪽은 셔츠, 아래쪽은 자켓과 넥타이, 바지. 아무리 봐도 교복을 걸어두는 용도다.


아르주나의 교복은 흰색 가쿠란을 개량한 것인 반면 카르나의 교복은 블레이저 식이다. 고풍스러운 가쿠란도 나쁘진 않지만 블레이저도 깔끔한 인상이 있다. 이쪽은 깔끔하기보단 좀 화려하지만.


검은 셔츠와 빨간색의 넥타이, 그리고 빨간색의 칼라와 노란색의 라인이 들어간 검은색의 블레이저 자켓과 같은 색 바지. 교복을 훑어보던 아르주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셔츠를 만져보았다.


매끄럽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질감.




…….”




긴장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긴장된다. 이 두께의 너머로 그의 팔이 있었다. 그의…….


아르주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생각이고 망상이다. 마침 머리를 박을 만한 벽도 있어 그 벽에 머리를 가져다 박았다.


한참이 지나 고개를 들어 옆을 보자, 셔츠는 역시나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아르주나는 그대로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카르나는, 특히 중학교 때의 카르나는 아르주나에게 있어 갑작스레 나타난 라이벌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라이벌은 아르주나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뿐더러, 아르주나의 아버지도 몰랐다. 그냥 그는 궁도를 했다. 화살을 채워 쏘았다. 그뿐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데리러 오는 사람도 없어서, 차를 타고 돌아가는 아르주나와 달리 그는 도복을 메고 걸어서 버스를 타러 갔다.


아르주나는 차를 타고 가며, 몇 번인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그를 봤었다. 그는 혼자 서 있었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붕 떠 있는 것처럼 커다랗게 아르주나의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경기장에서는 나란히 서서 활을 쏘았던 라이벌이 그렇게 멀리 있다. 아르주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버스가 오길 기다리며 뭘 하는지도 궁금했다. 어쨌든 카르나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만약 아르주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알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




거기서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한번 했다.


시간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번에는 느리고 완만하게 손을 뻗어 셔츠의 자락을 가만히 쥐어보았다. 무심코, 라는 말은 이번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르주나는 분명한 의도를 담아, 그 옷자락을 잡았다.


재질과 두께는 조금 전과 똑같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 아르주나는 그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셔츠는 아르주나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왔다. 사람이 있다면, 카르나가 있다면 절대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 지금은 그 방해꾼이 없다.


아르주나는 셔츠를 코끝에 가까이 한 채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독특한, 집마다의 냄새가 난다. 뭐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것.


카르나의 옷에서는, 생화의 냄새가 난다. 말린 꽃이라기보단, 살아 있는 것의 냄새다. 물을 머금은 뿌리와 줄기에서 나는 향기. 꽃집이라서일까. 거기에 섞여 햇볕과, 잘 데워진 흙에서 피어오르는 부드러운 냄새. 묘한 기분이 든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쇠의 냄새, 차가운 냄새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의 옷에선 따뜻하고 말간 냄새가 난다.


눈을 감았다. 그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그가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있다.


팽팽하게 당겨진 현, 꽉 다물린 입가, 과녁의 중심을 향하는 눈빛.


그 눈이 뭘 보고 있을지, 오랫동안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 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주나는 화드득 눈을 떴다.


아래를 지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르주나는 셔츠를 놓고 침대로 갔다. 그 발소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온다. 침대에 앉아 태블릿을 들었다. 다급하게 태블릿을 열었다.


숨을 고르면서, 이제 아무렇지 않은 척만 하면,




아르주나?”


…….”




태블릿 화면에는 지문 인식 오류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조금 전까지 망상하던 상대가 서 있었다.




……그건 내 것이다만.”


…….”




아르주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르주나, 얼굴이 빨갛다.”




아르바이트 복장을 한 그가 훅 앞으로 다가왔다. 아르주나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났다.




“?”


, 뭐냐.”


태블릿을 착각한 것 같아서.”




아르주나의 옆에 다가와 앉으며,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 있던 검은색과 파란색의 스트라이프 커버의 태블릿을 내밀었다.




…….”


네 건 이거다.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건 내 거다.”




내밀어지는 손.


아르주나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붉은색 커버의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가, 재빨리 카르나에게로 밀어냈다.


자신의 태블릿을 받아든 카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이런 걸 착각하다니, 별일이군.”


, 상관하지 마라.”


열이 있는 건가?”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가까워지는 얼굴을 참지 못하고 아르주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너는 이상한데.”


내가 이상하든 이상하지 않든 네놈과는 상관없을 텐데!”


…….”




카르나는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평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대로 침묵이 흘렀다.


아르주나는 반사적으로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폈다.




…….”


무슨 일 있니?”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하나 더 들린다 했더니, 곧 마스터가 올라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있는 카르나와 서 있는 아르주나를 번갈아 쳐다보곤 말을 걸어왔다.




어라, 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아니, 아닙니다.”




아르주나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그래? 옆집에서 케이크를 받아온 게 있는데 먹고 가지, 싶어서.”


아니, 괜찮습니다. 이제 가보려고 하고 있어서요.”


아르주나?”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럼.”




아르주나는 카르나가 조금 전 그에게 내밀었던 자신의 태블릿을 나꿔채듯 들고는, 침대 아래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들었다.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마스터가 서 있는 그 좁은 계단과 벽의 사이를 비집고, 아르주나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기까지 다행히 쫓아 내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가게의 문가에 이르러서야, 도망쳤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주나는 혹시나 카르나가 쫓아올세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꼬박꼬박 지켰을 횡단보도 신호도 전부 위반하고 세 블럭을 간 다음에야 아르주나는 그 자리에 발을 멈췄다.


마스터한테 주문 내용 전반을 전달한다는 걸 완전히 깜박하고 있었다.






 

 

그녀석이랑 요즘 사이 안 좋지.”




확정형의 질문에, 카르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망설였다.




아까도 목소리가 높아졌었고.”


…….”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일부러 올라갔었어.”




카르나는 물고 있던 초코 케이크의 조각을 삼켰다.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나와 다를 건 없으니까요.”


흐음.”


…….”




마스터는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다, 곧 졸업이잖아.”


그건, …….”


네가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면 나도 더 말하진 않겠지만.”


…….”


살면서 앙금 남길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가 그렇게 말했다. 마스터가 말한 두 글자 단어가 크게 내려앉았다. 앙금.


그 이야기 이후 마스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녁 영업을 마치고 가게는 문을 닫았고, 마스터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르나는 방으로 올라왔다.


침대에 누운 카르나는 그 단어를 되풀이해 보았다.


앙금.


여지껏 그 자신과 아르주나의 사이에 적당한 명칭을 붙일 수 없었던 만큼, 그 단어는 성큼 다가왔다.


그런가, 우리는…….


서로에게 앙금을 남기고 있는 걸까.


생각이 자꾸만 깊은 곳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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